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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 Poem & Etc

들깨 닭죽 시식

빨간부엉이 2020. 4. 4. 13:33


어지럼증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나의 일상을 매우 피폐하게 만드는 증세여.
지난해 어지럽던 건 연말에 찾아간 이비인후과에서 전정신경염이라고 해서 약 먹고 괜찮아진 듯했는데 몇 달 지나고 또 어지러워서 다시 병원을 찾았더니 이번엔 반대쪽 귀에 신경염이 좀 있는 거 같다고 해서 약을 먹고 괜찮은 줄 알았다.
살짝씩 어지럽긴 했지만 심한건 아니어서 무시했는데, 어젯밤에 늦게 퇴근하고 음악 듣다가 밤이 깊어지면서 점점 어지럽기 시작하더니 심해져서 바닥에 쓰러져서는 움직이질 못했다. (물론 못 움직일 건 아니지만 어지러울 때 움직이면 엄청 고통스럽기에 조금 덜 괴로우라고) 한참을 버둥거리다가 이번엔 일하느라 점심을 거르고 먹은 저녁 먹은 것들을 다 토해냈다. 그리고 이명증이 찾아왔다. 오른쪽 귀에서 삐하는 소리가 저녁부터 자기까지 귀를 지배했다. 
‘계속 이런 소리가 나면 음악 듣는데 지장을 초래하는데’ 라는 웃기지도 않은 생각을 하면서 겨우 새벽에 잠이 들었다가 언제나처럼 몇 시간 자지 못하고 또 깨고 말았다. 이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병원이 문 열 시간까지 기다리면서도 이명은 계속되었지만 다행히 병원 갈 때쯤 이명은 사라졌고, 어지럼증도 약간의 증세와 어지럼증에 동반되는 흐리멍덩한 의식 상태를 빼곤 나쁘지 않았다. 
코로나 검사팀의 불친절을 포함하여 불친절의 3단계 관문을 통과하여 여수에서 제일 크다는 병원의 이비인후과 앞에 앉았다. 여수는 사람들이 불친절 하기로 맘먹고사는 사람들만 모여있는 거 같다. 관광지화 된 원래 여수 쪽 사람들은 조금 낫다고 하는데, 합쳐지면서 여수가 된 여천 쪽 사람들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보면 정말 불친절과 무표정함에 적응하기까지 1~2년이 걸린다. 
얘기가 딴 길로 샜다. 예약을 안하고 간 터라 2시간을 기다려 또다시 청력검사와 이석증 및 이명 검사란 걸 했다. 이비인후과만 하는 작은 병원과는 달리 뭔가 디지털적인 느낌이었다. 앞에 두 차례 갔던 병원은 말 그대로 머리 잡고 흔들고 눈 상태 보는 아날로그 그 자체였다면 여긴 각종 기계들을 사용하는 것이 뭔가 신뢰감을 주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담당 젊은 의사분은 너무 무뚝뚝했고, 그래프만 보여 주면서 당신은 이상이 없는 그래프니까 지금은 알 수 없으니 증세가 심할 때 오라는 말 뿐이었다. 진료비는 동네 병원도 진료 행위 자체에 비해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세 배나 나왔다.
어지럼증이란 것이 어디 많이 아픈 사람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사람이 손에 가시 하나만 들어도 온 신경이 그리 집중되고 고통스럽다고 하는데 일상에 큰 타격을 주고 심하면 아예 운신을 못하게 하는 어떻게 보면 인간의 신체에서 꽤나 불편을 동반하는 몸의 가시가 아닐까 싶다. 가시가 어디에 박힌 건지, 정말 가시가 맞긴 한 건지 그걸 알고 싶은데 그런 걸 속시원히 알기가 참 어렵다. 색시가 온갖 병증으로 수도 없는 병원을 다녀봐서 알지만 늘 나가는 건 목돈의 검사비뿐 병증에 대해서 알려주는 병원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의지할 곳은 그런 곳뿐인 일반인의 나약함과 무지함이 서러운 날이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도 전정신경염이 심해서 꽤 오래 고생을 했는데,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서 한의원을 다니고 어쩌고 해서 고생만 예전에 내가 한참을 시켜드렸다. 난 어머니에 비하면 심한 것도 아니었는데 한 번씩 어지러울 때마다 그 지끈거리고 묵직한.. 표현하기 어려운 불쾌감에 하루 종일 시달리곤 하는데 어머니는 얼마나 고통이 심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고통을 느끼고서야 어머니의 고통을 이해한다. 이미 난 한참 불효자인걸 알고 있지만 새삼 내가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을 또 한다. 

아.. 들깨 닭죽.
병원 가기전에 어제도 종일 굶고 밤에 먹은 건 다 토하고.. 빈 속에 움직이기 싫어서 전에 사다 놓고 아직 개시 못한 들깨 닭죽을 먹었다. 
이 제품을 추천해주신 레퀴엠님의 표현에 따르면 ‘양반에서 나오는 전복죽이 그냥 커피라면 들깨 닭죽은 T.O.P 다’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첫 술 뜨니까 확 맛있다 라는 느낌이 왔다. 전복죽에 비해 건더기도 많이 있는 편이었고, 무엇보다 죽이라는 편견을 깨는 맛있음이라는 게 존재하는 듯했다. 장점이라면 맛과 내용물이었고, 단점이라면 내 입맛에 좀 짜다는 느낌이었다. 물을 좀 타서 먹던지 하는 게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간을 좀 세게 해서 먹는 분이라면 오히려 좋아할 수준이지만 색시 덕분에 저염식으로 입맛이 바뀐 요즘의 내 입맛에는 좀 짰다. 그래도 전복죽과 들깨 닭죽 중 하나만 먹으라면 단연 들깨 닭죽이다 ^^
닭죽 시식기는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쓸데 없는 푸념만 잔뜩 늘어놨다.


병원에 가면서 낡아가는 수동 마티즈 안에서 한대수 님의 3집 <무한대> 앨범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좋아하는 음반의 음악이 차에 시동을 걸자 USB 안에서 흘러나온다. 좋아한다는 것.. 그것이 내 자그만 공간에 차오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병원 길이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위안’ 이란 단어가 떠오르자마자 조건 반사적으로 눈물이 맺혔다. 나이 먹으면 눈물만 많아진다더니.. 그래도 안구건조증이 아닌가 보다 하는 그런 실없는 생각도 해본다.
한대수 님의 목소리와, 손무현 님의 기타 소리 나 이병우 님의 기타 소리, 김민기 님의 드럼 소리들에 몸이 반응하면서 새벽에 눈 떠서 읽게 된 요조 님이 동생을 사고로 잃고서 썼다는 글을 읽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빛나는 오늘의 발견”에 대한 그 글을 내 시간에 대입해 본다. 산수도 못하는 수포자인지라 제대로 된 답이 대입식에서 나올 리 만무하건만 그래도 대입해 본다. 그래서 나온 오답은 아래와 같다.


오늘만 살 것처럼 사는 것도 좋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동여메고 사는 것도 좋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고 그 삶이 그걸로 유지된다면 그게 의미 있는 게 아닐까. 요즘 나의 어정쩡한 삶에 대해 생각한다. 내일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오늘을 즐기는 것도 아닌 미적지근한 삶. 그러면서도 겨우 겨우 한 달, 한 달을 버텨 나가는 삶. 그 시간의 소비가 요즘의 내 의식을, 내 영혼을 좀먹고 있구나 싶은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심해지면 우울증이란 것으로 발전하겠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가진 자원 안에서 애써본다. 석유는 어렸을 때도 50년이면 바닥이 날 거라 그랬는데, 지금은 그런 소리도 안 하고 여전히 펑펑 잘만 쓰고 있다. 나의 자원이란 건 점점 마이너스 방향으로 다시금 치닫고 있는데 (금전적인 것이든 무엇이든) 퍼 써도 다시 채워지는 화수분 같은 그런 자원이 내게 존재하길 꿈꿔본다.  
머릿속 가시가 불러오는 오늘의 망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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