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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e Arts

{Kathe Kollwitz}

빨간부엉이 2006. 3. 19. 22:43

부엉이가 선택한 아티스트 2 {Kathe Kollwitz}




최근에 본 세 가지 아름다운 것들 : 하나 - 지하철 봉천역 남자화장실에 걸린 내가 좋아하는 모네의 그림 두 점. 누군가를 만나러 가다가 들른 화장실에서 마주치는 짧은 기쁨.
둘 - 11월의 모 Day에 중학교 1~2학년쯤으로 보이는 이제 얼굴에 열꽃이 피기 시작한 소년과 단발머리의 귀여운 소녀가 마주서서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이 경건하게 소년은 새하얀 목도리를 꺼내 소녀의 목에 둘러주고 함께 어딘가로 가는 모습을 봤지.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여서 미소짓는 나. 타인의 행복에서 오는 작은 나의 행복.
셋 - 시골집에 내려간 새벽이면 늘 고즈넉한 인가하나 없는 산 속 외딴집에서 마당 차 안에 앉아 누군가와 긴 통화를 한다. 쏟아질 듯 많은 별들. 도시에서의 생활을 오래 했었음에도 지금 일년정도 객지에 나와 있으면서 그리워지는 것들 중의 하나가 밤하늘의 많은 별이고 보면 간만에 보는 밤풍경이 새삼 아름다워 보임은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
그런데 세상은 아주 많이, 그리고 자주 아름다운 풍경보다는 고통스러운 일면을 보여준다. 구토가 일만큼 고통스런 살아가기..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 고통의 끝을 힘겹게 열어보는 일도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을는지 생각해본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선택한 두 번째 아티스트는 평생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였으며 전쟁에 대한 광폭함을 고발하고 시작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죽음에 대한 화두를 걸머지고 힘겹게 한 세상을 응시했던 독일의 판화가인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를 선택해본다.
아티스트를 선정하면서 이제 겨우 두 번째이긴 하지만 한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을 내 어설픈 몇 줄의 글로 소개함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늘 가지게 된다. 더불어 소개하는 아티스트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일까... 또는 얼마나 모르는 사람일까... 늘 난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남들도 다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래서 가끔 당황하게 되는 일도 발생을 하는데 무언가를 소개하고자 할 때 다 아는 걸 내가 또다시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 싶어지는 노파심이 생기곤 한다. 그렇지만 만인이 안다고 하더라도 내가 보는 입장은 또 나만의 것이겠기에 또다시 용기를 내보기로 한다.
그녀의 작품을 내가 처음으로 접한 것은... 글쎄.. 한 5년쯤 전이었을까. EBS에서 청소년 대상으로 하는 미술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우연히 그 프로그램을 보다가 콜비츠의 {직조공 봉기연작} 중의 하나인 동판으로 제작된 [폭동]이라는 작품을 보게 되었다. 소개되는 몇 작품을 보면서 TV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나. 그렇게 그녀의 작품은 사람의 시선을 순간적으로 잡아끄는 힘이 있다. 미술이 작가의 주관적인 입장을 객관적이지 않은 묘사로 드러내면서 그 사이에 생긴 괴리와 간극을 순식간에 허무는 극사실주의적인 상황묘사는 예술이라는 미술의 허위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면서 핍박받고 고통받고 역사 안에서 이름조차 가질 수 없었던 민중과 농민의 초상을 현실안에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때론 그 슬픔이 너무 커서 때론 그 아픔이 너무 강해서 작품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작품을 곁에 두고 늘 지켜봐야 하는 일은 나태해지고 교만해지기 쉬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위를 돌아보라는 작은 의무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콜비츠의 작품 세계는 20세기의 초반에서 중반까지를 관통하고 있다. 그 시기에 세계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치러내면서 반세기 가까이를 전쟁의 고통속에서 사람들을 신음하게 만들었고 전쟁에 대한 콜비츠의 사상은 목판으로 제작된 전쟁연작에서 고스란히 살아나고 있다. 또한 그 긴 전쟁의 시기에 자식과 손자를 잃으면서 그녀의 작품세계에 죽음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며 죽음에 대한 긴 상념은 작품 하나 하나 마다에 강렬하게 묻어나고 있다.
민중의 생각을 대변하는 그녀의 작품은 그 강한 선동성으로 말미암아 프로파간다(propaganda-선전-선동)로 매도되던 시기도 있었고.. 국내에서는 80년대라는 우리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그녀의 작품이 소개되던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한 작가의 생각이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나쁘게 말하면 이용당하고 필요가 없어지면 비판 받고 금지당하는 일은 비극적인 일일 것이고 그녀의 작품과 우리의 만남은 시대적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참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일에서 동양으로 넘어온 그녀의 작품세계와 사상은 중국의 목판화운동과도 닿아 있고 중국에서의 영향또한 시대적 조류에 의함이었기에 어쩌면 그녀의 작품은 순수하게 작품으로서의 평가보다는 역사와 가슴아픈 시대의 평가와 맞물려 있음으로 인하여 안타깝게 만드는 많은 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예술가로서의 콜비츠의 삶은 그녀의 작품이 주는 이미지들로 인하여 세상과 사상에 이용당하기도 했으며 민중과 핍박받는 서민의 삶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은 사회주의 안에서의 세상에 대한 꿈을 가지게 만들었던 당연한 귀결이며 어려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죽음’에 대한 깊은 천착은 평생을 진지함속에서 작품 세계를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었고,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나 교회가 가진 폐단에 순응할 수 없었던바 종교를 버렸었던 콜비츠... 종교를 버렸지만 평생을 버리지 않았던 신에 대한 신앙심은 그녀의 작품 모두에 스며들어 있고 개인적으로 기독교가 세상에 빚어내고 있는 수많은 폐단에 대해 신앙심이 있고서 교회가 있기를 바라는 내 마음과 맞물려 있기에 콜비츠의 생은 적어도 내게 있어선 존경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설이 길었는데.. 그럼 이제 그녀의 주요 작품을 보도록 하자.

{직조공의 봉기연작}




궁핍/석판/1897



죽음/석판/1897



음모/석판/1898



직조공들의 행진/동판/1897



폭동/동판/1897



결말/동판/1897


{직조공들의 봉기연작}은 콜비츠의 작품을 소개하는 글을 쓰면서 참고하고 있는 서적에서 위의 여섯 작품으로 소개를 하고 있는데 [음모]라는 작품은 연도가 뒤에 배치되어 있어서 직조공 연작에 속하는 것인지 나중에 들어간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위의 여섯 작품은 석판과 동판으로 제작된 것들이며 석판이 주는 감정의 풍부함과 동판이 주는 날카로운 사실묘사성이 뛰어난 작품들이다. 위의 연작은 콜비츠가 1893년 2월 28일에 베를린에서 공연된 하우프만의 연극 [직조공들]을 관람하고서 거기서 받은 감동을 작품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직조공들의 봉기는 희곡을 쓴 하우프만의 고향 실레지엔에서 콜비츠가 연극을 관람하기 전인 14년 전에 고용주들을 상대로 한 방직공들의 봉기를 기초로 한 것이며 산업혁명으로 기계화된 방직기로 인해 극도로 궁핍한 생활상에 시달리게 된 직조공들의 대규모 봉기로 기록되고 있다. 하우프만의 연극이 독일에 끼친 영향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면 ‘실레지엔의 리젠 산맥에서 뻗어나온 산 위에서의 산상수훈’과도 같았다고 하니... 그 연극에서 콜비츠가 어떤 감동을 받았을지는 길게 얘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거 같다. 그렇게 태어난 연작에서 [궁핍]과 [죽음]을 보면 그 비참한 생활상과 죽음과 늘 맞닿아 살아야 하는 비참함이 적나라하게 들어나 있다. 이런 작품을 보는 일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기계화된 공장에서 소외된 수공업 노동자들은 [음모]를 꾸미고 결국 직조공들은 [직조공들의 행진]이라는 작품에서 보여지듯 대규모 시위를 나서게 되고 동판으로 제작된 [폭동]에선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제 기계로 인하여 그들을 고통 속으로 내쳐버린 고용주의 화려한 저택 앞에서 도로의 돌을 캐내어 투쟁하는 모습을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결말]에서 동료들의 주검을 집안으로 날라오는 모습을 통해 보여지듯 그들이 봉기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콜비츠는 어두운 배경의 집안묘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농민전쟁 연작}




밭가는 사람들/동판/1906



능욕/동판/1907



낫을 갈면서/동판/1905



무기를 들고/동판/1906



폭발(Losbrush)/혼합기법/1903

봉기/동판/1899



전쟁터에서/동판/1907



죄수들/동판/1908


{농민전쟁 연작}은 위의 7개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봉기]라는 작품은 농민전쟁을 주제로 1899년에 작업한 것으로 ‘검은 안나’라는 실존했던, 농부들을 선동해서 전쟁터로 내보냈던 여농부를 지칭하는 것인데 [봉기]에서 깃발위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허공에서 농부들을 이끌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 반면 [폭발]에서는 작품 밖으로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한 강렬함 앞에서서 농부들을 진두지휘하는 좀 더 사실적이면서도 강렬한 캐릭터로 묘사가 되고 있다.
농민전쟁은 16세기에 독일에서 일어났던 농민들의 저항전쟁이었고 이 역사적인 투쟁을 당시 사회주의에 심취해있던 콜비츠가 주제삼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주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사회를 계급사회로 보던 사회주의의 시각에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인 억압받는 노동자를 양분하고 어느 한쪽을 미화하는 일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지만 콜비츠는 농민전쟁 연작에서 농민들을 미화하는 대신에 그들이 처한 고통의 일면과 전쟁의 모습을 묘사하는 선에서 작품을 보는 이들의 감정을 훌륭하게 끌어내고 있다. 연작이라는 작품의 성격상 작품은 서사구조를 띄게 마련이고 [밭가는 사람들]에서 농민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듯한 상황묘사는 농민전쟁의 당위성을 고통받는 농민의 모습에서 찾고 있고 거의 대지와 맞닿을 듯이 밭을 가는 고통스런 농민의 모습에서 나는 마치 내가 쟁기를 지고 밭을 갈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밭가는 사람들]에 이어 농민전쟁 연작의 두 번째 작품인 [능욕]에서 농민들의 터전인 꽃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위에 강간을 당하고 처참하게 버려져 있는 농가 여인네의 모습에서 지배계급으로부터 유린당한 농부들의 입장을 작품으로써 대변하고 있으며 , [낫을 갈면서]에서는 일상에 지친 여인이 날카롭게 낫의 날을 세우는 모습에서 농민전쟁이 곧 시작될 것임을 보여준다. 이어 [무기를 들고]라는 작품에서 폭정에 지친 농민들은 무기를 들고 왕정과 전쟁을 시작하고 앞에서 언급한 ‘검은 안나’가 인도하는 방향으로 봇물 터지듯이 농민들은 [폭발]하여 달려간다. 허나 역사의 비참함은 피지배계급이 국가지배체계를 뒤집어 엎는 것에 실패했을 때의 참담함을 잘 일러주고 있고 콜비츠는 전쟁의 상황을 묘사하는 대신에 시체로 뒤덮인 들판에서 자식의 주검을 찾아 헤매는 어머니의 모습을 묘사하는 [전쟁터에서]라는 작품으로 농민전쟁의 끝이 어떤 것인가를 담담하게 얘기하고 있다. 고통은 어둠 속에서 작품을 보는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죄수들]에서 전쟁이 끝나고 이제는 수인(囚人)의 운명을 걸머져야 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묘사하며 {농민전쟁 연작}은 어둡게 마감을 한다.


{전쟁 연작}




희생/목판/1922~23



지원병들/목판/1922~25



부모/목판/1923



과부1/목판/1922~23



과부2/목판/1922~23



어머니들/목판/1922



전쟁은 이제 그만/석판/1924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석판/1942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아들과 손자를 전쟁에서 잃은 콜비츠의 전쟁에 대한 생각은 두말할 필요 없는 끔찍한 아픔이었을 것이다. 콜비츠는 직조공의 봉기연작과 농민전쟁 연작에 이어 다시 한번의 연작을 제작하는 데 이번엔 석판과 동판이 아니라 단순성안에 메시지를 보다 강조하는 목판화로 {전쟁 연작}을 제작하여 발표하였고 직설적인 화법대신에 은유성을 가미하여 보다 원숙해진 작가로서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전쟁 연작은 전쟁에 정면으로 맞선 한 작가의 생각들을 담고 있으며 전쟁이 야기시키는 가족간의 이별과 고통, 보이지 않는 슬픔과 살아있음에 대한 아픔을 단순한 목판화의 선과 면에 기대어서 조용히 얘기하고 있다. 전쟁 연작은 하나의 서사구조하에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각각의 작품들이 전쟁보다는 전쟁이 야기한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보면 될 거 같다.
전쟁 연작에서 [희생]은 중국 목판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며 아이를 보이지 않는 무엇엔가 바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전쟁에 자식을 희생시키는 아픈 어머니의 마음을 묘사하고 있다. 전쟁 연작의 두 번째 작품은 [지원병들]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해골의 얼굴을 가진 이가 초점 없는 눈의 소년들을 인도하여 전쟁터로 끌고 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제목은 지원병이지만 그들의 참전이 결코 그들이 원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얘기하는 콜비츠의 시선.. 사회가 시대가 어쩔 수 없이 어린 소년과 아들들을 전장으로 이끈 것에 대한 콜비츠의 보이지 않는 분노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전쟁 연작에서 콜비츠는 비례가 맞지 않는 커다란 손을 화면에 자주 등장시켰는데 [부모]와 [과부1]에서 예의 그 불균형의 커다란 손이 등장을 한다. [부모]에서는 전쟁에 나간 자식의 전사 소식을 듣고 혼절한 어머니를 통해 이별의 슬픔을, 슬픔을 주체 못하여 얼굴을 가린 아버지의 손을 통하여 고통의 감정을 한 곳으로 집중시킨다. [과부1]에서는 남편의 죽음과 사생아가 될 아이를 잉태한 어머니가 뱃속의 아이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손을 통해 전쟁이 불러온 가족간의 참담한 미래상을 뼈아프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과부2]에서는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들은 아내가 어린 아이를 가슴에 안고 기절하여 쓰러진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한 가족의 미래는 그렇게 쓰러져 버리고... 슬픔은 그 쓰러짐에서 씨앗을 뿌려 평생을 조금씩 자라날 것임을... [어머니들]은 두려움에 찬 눈동자로 그러나 여성 특유의 강한 모성애를 결집시켜 서로 부등켜 안고 연대하여 어린 자식들을 보호하는 여리면서도 강한 감성을 그리고 있다.
전쟁 연작은 7개의 목판화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하나의 작품이 무엇인지는 참고한 서적에서 밝히고 있지 않아서 6개의 작품만을 올렸다. 그리고 아래 두 개의 작품은 콜비츠의 반전에 대한 사상을 드러낸 작품 중 널리 알려진 작품 중 두 개의 작품을 올렸다. [전쟁은 이제 그만]과 괴테의 글에서 제목을 따왔다는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는 석판화로 제작이 되었고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라는 작품은 콜비츠의 마지막 석판화가 되었다고 한다.

이상으로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세 개의 연작 시리즈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세 개의 연작 시리즈를 제외하고도 일상의 모습을 담은 콜비츠의 작품과, 많은 자화상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그녀의 평생의 생각들을 담은,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꼭 찾아서 한번씩 봤으면 한다. 어설프게 콜비츠의 작품을 소개하는 거 같아서 맘이 편치는 않지만 모르는 이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작은 시작을 제공할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에서 편치 않은 마음을 누르고 감히 어설픈 이야기들을 적어보았다. 세상과 이념과 사상에 대한 것들은 참 많이도 변했고 지금도 쉼없이 변해간다. 한 작가의 사상은 동시대를 아파했고 사랑했으며 그렇게 그 마음들을 작품으로 표출했다. 지금 그 가치가 비록 예전과 많이 다르다고는 하나 한 인간의 절대 가치를 공유한다는 마음으로 콜비츠의 작품을 바라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녀도 한 인간이기에...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유한의 생명을 지닌 나약한 존재들이기에... (맨 위에 있는 자화상은 1938년에 석판으로 제작된 [오른쪽을 향한 옆얼굴 자화상]이다.)

Text by 미네르바의 부엉이 (2001년 11월 19일)

참고도서 : 도서출판 재원의 민혜숙 저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케테 콜비츠]

케테 콜비츠 연보 (참고도서에서 옮김)
1867. 7월 8일 미장이 일을 하는 칼 슈미트와 그의 부인 카타리나 사이의 다섯 번째 아이로 태어남. 형제 세 명은 어렸을 적에 죽음.
1881.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미술 수업을 받음.
1884. 어머니등과 함께 스위스 여행. 여행 도중 뮌헨에서 루벤스의 작품에 크게 감명 받음. 귀로에 베를린에서 하우프트만을 만나게 됨.
1885. 베를린 여자미술학교에서 스위스 화가 칼 슈타우퍼베른의 지도를 받음.
1888~9. 뮌헨에서 2년간 루드비히 헤르테리히의 지도를 받음.
1890. 쾨니히스베르크에 돌아와서 노동자들의 생활을 모티프로 삼아 작업을 함.
1891. 칼 콜비츠와 결혼해서 베를린 북부지역에 정착. 의료보험조합 의사인 칼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통해 대도시 산업 노동자들을 가까이 하게 됨.
1892. 5월, 아들 한스 태어남. 손, 머리, 자화상등을 처음 동판화로 시도함.
1893. 하우프트만의 [직조공들]을 관람. [직조공 봉기]에 착수.
1896. 둘째 아들 페터 출생.
1898. [직조공 봉기]를 베를린 대전시회에 출품. 심사위원회에서 주기로 결정한 금메달을 황제가 거부. 아버지 칼 슈미트 별세.
1899.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 참여. 드레스덴에서 막스 리버만의 제의로 은상을 받음.
1903. [농민전쟁] 연작 판화 중 [폭발]을 첫 작품으로 내놓음.
1904. 파리에 수 주일 동안 체류하면서 미술 수업.
1906. 독일 가내공업 전시를 위해 그린 플래카드가 황후의 요청으로 철거됨.
1907. 빌라-로마나 상으로 피렌체에 수개월간 체류.
1908. [농민전쟁]연작 완성. 9월 18일, 일기를 쓰기 시작.
1907-9. “짐플리시시무스”에 사회비판적인 작품 기고.
1912. 바이쎈부르크가에 아뜰리에 마련.
1914. 1차 세계대전 발발. 둘째 아들 페터가 딕스뮈덴에서 10월 22일 전사.
1917. 4월에 50회 생일을 기념해서 [카씨러]화랑에서 대규모 전시.
1918. 10월 30일 “전진”에 [리햐르트 데멜에게!] 발표.
1919. 칼 리프크네히트 가족의 요청으로 그를 기리는 작품에 착수. 1월 24일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로이센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면서 교수직도 받고 거기에 아뜰리에도 갖게 됨.
1920. 큰 아들 한스 결혼.
1921. [러시아를 도우라]제작. 첫 손자 탄생. 죽은 둘째 아들 이름을 따서 페터라고 지음.
1923~4. [전쟁]연작을 목판화로 제작. 5월 쌍둥이 손녀 탄생.
1924. 8점의 판화로 된 [이별과 죽음]발간. 하우프트만이 서문을 씀. [빵을], [전쟁은 이제 그만]제작.
1925. 2월 16일, 어머니 돌아가심. [프롤레타리아트] 연작을 제작.
1926. 남편과 함께 페터가 잠들어 있는 딕스뮈덴으로 여행.
1927. 러시아 혁명 10주년 기념식에 참여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11월에 모스크바에 감.
1928. 예술 아카데미 판화 부문의 최고 담당자가 됨.
1930. 막내 손자 탄생.
1931. 17년에 걸친 작업 끝에 아들 페터를 위한 추모비 [부모] 완성.
1932. 7월에 추모비 [부모]를 세우기 위해 칼과 벨기에에 감. 10월 오빠 콘라드 사망.
1933. 민족사회주의자들(NS)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하인리히 만 등과 함께 아카데미 탈퇴.
1934. 죽음을 테마로 한 석판화 제작 시작.
1935. 가족묘지를 위한 브론즈 부조를 제작.
1936. 개인적인 전시회를 금지한다는 공식적인 통보를 받음.
1939. 2차 세계대전 발발.
1940. 칼 콜비츠 7월 19일 사망. 손자 페터, 군에 징집되다.
1942.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라는 석판화 제작. 9월 손자 페터, 동부전선에서 사망.
1943. 여름 여류 조각가 마르그레트 뵈닝이 있는 노르트하우젠으로 강제 이주됨. 11월, 51년 동안 콜비츠가에 살았던 바이쎈부르크가의 집이 폭격당함. 며칠 후 베를린 교외의 아들 집도 전소됨.
1944. 작센 왕자 에른스트 하인리히의 도움으로 모리츠부르크성에 인접한 뤼덴호프로 이주.
1945. 4월 22일. 콜비츠 사망.

덧붙임 : 2차 세계대전의 끝조차 보지 못하고 그녀는 생을 마치고 말았다. 하지만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했던 그녀의 오랜 바램은 곧바로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잠깐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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