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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활자 잔혹극」

빨간부엉이 2025. 2. 26. 15:11


「활자잔혹극」


지은이 : 루스 랜들
옮긴이 : 이동윤
펴낸곳 : 북스피어
분량 : 311쪽
2024년 6월 18일 초판1쇄 발행본 읽음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건 '극'이다. 읽다 보면 마치 이 책은 논픽션 다큐 같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에 이 작품이 '극'임을 강조해 본다. 「활자잔혹극」이란 작품 자체가 몰입도가 굉장히 훌륭하고 막힘 없이 군더더기 없는 독서 진행을 선사하기에 어쩐지 요즘 나온 20세기 중반을 무대로 하는 소설 같다는 느낌을 받지만 사실 출간한 지 50년쯤 된 도서임을 생각해 본다면 출판사에서 이 책을 복간하여 출판한 이유를 알만하다. 

범인이 누구인지 선 공개 후 전개되는 이야기는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을 생각나게 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 작품은 1926년에 발표된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 고전 걸작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은 걸작의 반열에 든 작품이고 기억 속에 각인된 건 역시나 충격적인 결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요즘 말로 치자면 반전이고 독자를 기망한 행위일 수도 있었던 여사의 작품을 어려서 읽었던 충격은 실로 대단했는데 「활자잔혹극」에서 또 한 번 그런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했던 것 같다. 

돈 많은 저택에 사는 아내에게 붙여줄 가정부를 구하는 어느 시골의 저택에서, 구해진 가정부로 인해 벌어진 일가족 살해 사건을 다루고 있는 「활자잔혹극」은 다큐같고 르포 같은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것이 알고 싶다> 라든가 <꼬꼬무> 같은 곳에서 다룰 만한 사건일 수도 있겠다. 물론 현실이었다면 말이다. 

문맹으로 살아왔기에 자신의 결점을 감추기 위해 감정을 결여시킨 삶을 살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살인도 서슴치 않았던 가정부 유니스는 책과 활자로 둘러싸인 시골 저택에 와서 저택의 안주인에게 매우 인정받는 생활을 하지만 감정이 제거된 듯한 그녀의 일상에서 이상함을 감지한 집주인에게 의해서 해고를 통보받는다. 그리고 집에서 나가야 하기 전날 이단 종교에 심취해 결국 정신 이상이 되어버린 그 마을에서 사귄 친구 (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 유니스라는 사람 자체가 친구를 사귀거나 할 사람이 아니므로)와 함께 TV에서 방영되는 오페라를 감상하던 일가족을 총기로 살해한다. 

살인이 벌어지기까지는 거의 책의 말미까지 끌어가게 되고, 살인이 벌어진 후 거기서 빠져나가려는 가정부 유니스의 행동과 우연에 우연을 더한 계기로 그녀의 범죄가 밝혀지는 순간의 서술은 꽤 짧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흥미진진하고 서스펜스가 넘쳐나며 옛날 표현에 따르자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살인이 벌어지기까의 시간들은 활자로 인한 결점이 유니스라는 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난 화학작용처럼 보이지만 시대적이든 아니든, 어쩌면 지금 현재도 유지되고 있는 계급 갈등과 빈부 격차로 인한 사회적 모순들에 대한 우화적인 묘사들도 곳곳에 녹아있다. 

출판사 북스피어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패러디하며 "복간할 결심" 이라는 카테고리로 열 권의 책을 출판하겠다고 하며 과거에 출판했다가 빛을 보지 못한 작품들을 복간해서 펴내겠다고 했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이 「활자잔혹극」이 되었다. 새 책을 잘 구입하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이 책은 표지도 그렇고 기획 의도도 그렇고 사서 읽어 보고 싶게 만들었기에 예약 구입을 해두었다가 해가 바뀌어서야 읽어 보게 되었다. 

군더더기 없는 문체와 스피디한 서술은 감정 과잉을 만들어 내지 않으며 담백함 속에서 작가가 얘기하고자하는 함의를 읽어내기 좋게끔 진행된다. 명작이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는 이유는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미유키 여사의 <화차>의 내용을 잘라먹고 출판하여 욕을 먹었던 출판사의 가치를 새삼 되새겨 보게 하는 기회를 주었다. 진심으로 "복간할 결심"의 2회 차 무대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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