첸 카이거 감독의 영화 / 그 실망의 뒤에 서서 그렇다. 시대는 과거 우리가 거장이라 부르던 이름들을 마음대로 호명하고.. 또 그렇게 짓밟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의 영어제목인 '약속'.. 그 약속의 끝에서 감독이라는 사회적 직업을 가진 한 사람은 대중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인지 아니면 사회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함인지.. 자신에게 주어진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긴 그림자로 간직한 채 상업주의 한켠에서 새로운 행보를 내딛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누구를 위한, 또는 누구에게 하는 약속인가? 라는 질문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첸 카이거' 그는 장 예모 감독과 함께 90년대를 살아간 젊은 지성에게 가장 영향력있는 중국의 거장이었다. 왜 그는 거장이었었는가? 누구에게도 하지 ..
부엉이가 선택한 아티스트 1 {Maurits Cornelis Escher} 내가 처음 에셔의 그림을 접했던 건 영화 전문지 [키노]에서였다. 영화비평안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던 에셔의 불가해한 그림들을 보면서 그의 작품 전시회를 보고 싶다는 꿈을 가졌었지만 사람도 잘 들지 않는 산골에서 그런 바램은 참 어리석은 것이었다. 웹 프로그램을 배우면서 html의 가장 기초적인 것들을 배운 후 담임선생님은 컴맹이나 다름없는 나와 다른 반원들에게 홈페이지를 만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무엇을 만들까? 어떻게 만들지? 라는 생각을 하다가 내 얘기만으로 홈페이지를 만든다는 게 참 우습기도 해서 차라리 한가지 주제를 정하고 만들어보자 했던 것이 에셔의 홈페이지를 만들게 되었던 계기였다. 아직 오픈중인 홈이니까 지금이라도 ..
부엉이가 선택한 아티스트 2 {Kathe Kollwitz} 최근에 본 세 가지 아름다운 것들 : 하나 - 지하철 봉천역 남자화장실에 걸린 내가 좋아하는 모네의 그림 두 점. 누군가를 만나러 가다가 들른 화장실에서 마주치는 짧은 기쁨. 둘 - 11월의 모 Day에 중학교 1~2학년쯤으로 보이는 이제 얼굴에 열꽃이 피기 시작한 소년과 단발머리의 귀여운 소녀가 마주서서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이 경건하게 소년은 새하얀 목도리를 꺼내 소녀의 목에 둘러주고 함께 어딘가로 가는 모습을 봤지.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여서 미소짓는 나. 타인의 행복에서 오는 작은 나의 행복. 셋 - 시골집에 내려간 새벽이면 늘 고즈넉한 인가하나 없는 산 속 외딴집에서 마당 차 안에 앉아 누군가와 긴 통화를 한다. 쏟아질 듯 많은 별들. 도..
{영화 ‘비트’에서의 소외라는 이름의 청춘담론과 미장센의 결여에서 오는 유행과의 철저한 담합에 대하여} 홀로 웅크린 방안에서 먼지 부옇게 낀 거울을 통해 혼탁한 세상을 떠돈다. 마주 보이는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선한가 아닌가 하는 愚問을 던진다. 영화 ‘비트’는 어쩌면 그 우문에 대한 대답이 되기 위해서 시작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열 아홉 이라는 나이가 주는 우리 사회 속의 제도적 정형성이 묶어두지 못하는 일탈의 무리들이 빚어내는 문제는 비단 가출과 자살, 마약과 섹스와 이지메가 아니라 일순의 감정혼돈과 갖추어지지 않은 의식세계로부터 오는 부유(떠돎)함이 더 큰 문제가 아닐는지. 열 아홉의 나이로서 가지는 영화속 아웃사이더들의 심리적 담론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학교- 적어도 그들..
{뜨거운 피를 지닌 한 남자의 일생과 너무 차가워진 우리 피를 돌아보며} 뜨거운 피를 지닌 한 남자의 일생에 대한 영화를 본다. 도입부의 어둠속으로부터 밝은 빛으로의 주인공의 나아감은 영화 종반의 행복한 결말을 의미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 까지 나 종내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더 이상의 비극이 없기만을 바랬다. 소오(여명 분)의 반항아적 기질이 아버지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에 그의 자폐적 증상에 대한 합리화를 감독은 영화 속에서 꾀하고 있다.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해소되지 않는 부자의 갈등이 인연과 기다림이라는 주제와 함께 영화를 끝까지 이끌어가며 얼마 남지 않은 홍콩의 반환이 홍콩영화 전반에 가로 놓여져 있음이 느껴짐은 여러모로 좋은 시대의 좋은 영화를 빼앗긴다는 점에서 날..
{살인에 관한 긴 필름 -} 요즘 신문에 보면 작고한 폴란드의 감독 크쥐스토프 키에슬로브스키의 회고전이 동숭인지 호암인지 아트홀에서 열린다고 한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이 상영된다고 하던데 보고는 싶고 볼 수는 없고 해서 울적한 마음에 비디오가게에 갔다가 예전에 감동적인 음악과 내용으로 기억되던 이 영화 ‘일급살인’을 다시금 보게 되었다. 어느날 자신이 외롭다고 생각되고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그대 곁의 가까이 있는 사람들도 그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어느 누구도 특별한 사람은 없다. 단지 하나의 자아를 지닌 객체이고 그 지닌 것이 조금 다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우정은 사랑처럼 우연히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최근 영화 ‘더록’을..
{단편영화 "생강"을 보고 나서..} 올해 일월 어느날 제3회 서울단편영화제의 출품작들이 광주 어느 예술관에서 상영된 적이 있었다. 최근 들어 부쩍이나 팽창된 일련의 우리나라 영화제 속에 서 젊은 감각이 숨쉬는 단편영화를 보기 위해 난 하루 휴가를 냈고 그속에서 9 시간을 화면속에서 유랑하여야 했다. 젊은 비평가상, 예술 공헌상, 최우수 작 품상을 수상한 ‘생강’은 영화학도들의 습작과도 같은 여타 작품에 비해 단 연 돋보였다고 할 수 있다. 생강... ... 살다보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과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불가 항력적인 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현실의 리얼리티는 미화의 과정이나 미사여구 로 포장한 문학이니 영상세계 속의 서정적 인두겁을 뒤집어쓴 허구가 아니기 에 어찌보면 쳇바퀴 돌 듯..
{“엿 먹어라”라고 하는 아이들로부터 ‘엿먹는’영화} 글쎄, 여러 가지 이유에서 늦게 이룬 잠을 이른 시간에 쫒아내고 극장을 찾았다. 여러 가지 이유는 이 영화가 왜? 상영불가가 됐으며 왜? 평가극상과 평가 절하의 양극단에 서 있어야 하는지 내가 보아야 하겠기에 그 하나도 안 바쁜, 언제나 안 바쁜 일요일 조조할인 -겨우 300원밖에 안 깎아주는데- 으로 영화 를 보았다. 영화제목은 97영화판의 중반기 뜨거운 감자 ‘나쁜영화’였고 영화 가 끝난 뒤의 느낌은 ‘나쁘다’였다. 어떤 의미에서의 나쁘다인지 이제부터 얘기하고자 한다. 비록 변죽을 울리는 얘기지만 시내의 ‘나쁜영화’가 상영되 는 극장은 작은 관객석과 스크린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내가 본 썩 괜찮은 영화 들의 상영관이었고 더욱이 괜찮은 한국영화가 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