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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조윤경 - [해금산조(한범수류)]

빨간부엉이 2021. 1. 11. 22:46

조윤경 - [해금산조(한범수류)]  / 2020 / JOEUN Music

List

1. 다스름
2. 긴 산조 - 진양
3. 긴 산조 - 중모리
4. 긴 산조 - 중중모리
5. 긴 산조 - 자진모리
6. 짧은 산조


해금 연주가 들어있는 음반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 보니 아주 예전에 산울림의 노래를 해금으로 연주한 음반인 <해금의 꿈>이란 앨범을 가지고 있었었다는 생각이 났다. 그 뒤로 시간이 꽤 지나서 꽃별이란 분이 크로스오버로 해금 연주 음반들을 연달아 내면서 스타 연주자로 등장했던 기억이 난다. 꽃별님의 음반들은 몇 장 듣다가 취향이 아니어서 접었는데, 정통 해금 연주를 들을 기회가 없이 이런 류의 음악들을 들으면서 해금 소리를 좀 싫어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거 같다. 그러다가 부산 국립국악원의 해금 수석 연주자로 계신다는 조윤경님의 해금산조 음반을 소개하는 글과 녹음된 음악을 살짝 들어 보면서 내 맘 속을 강하게 자극하는 무언가가, 제대로 된 해금 연주 음반에 담겨 있구나 하는.. 그러면서 내가 예전에 해금 소리를 오해하고 잘 못 인식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좋은 기회가 있어 조윤경님의 음반을 공동구매? 할인 구매? 식으로 구매를 하게 되어 지인들 것까지 몇 장 같이 구입을 했다. 음반을 받아 들고 어제 3번 정도 들었고, 오늘 늦은 퇴근을 해서 음반을 한 번 정도 더 경청을 했다. 내가 국악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음악에 대해 아는 거라곤 듣는 귀를 가진 것뿐인지라, 장단이 어떻고 고저가 어떻고 연주의 음량이 균질하고 어쩌고 하는 그런 것에 대해 논할 수는 없다. 그저 한 청취차로서 하나의 음반에 대해 듣고 느낀 바를 적어보는 것뿐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말이다.

음반에 대한 감상이란건 음악을 비트로 쪼개고 멜로디를 분절하여 갑론을박하는 평론의 장이 아니다. A라는 결과물이 있고, 그 결과물을 듣고서의 누군가의 감상이란 건 아무래도 과거장의 시제를 받아 든 응시생의 마음일 수도 있고, 화제話題로써의 소재가 될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일 수도 있고, 백지를 받아 들고 그림을 그려내야 하는 간접적 작가의 시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음반에 대한 내 감상의 그림.. 그 화제畫題는 '우수에 찬 달콤함과 비통의 그리움' 이다. 소리는 경쾌한 듯한데 그 뒷 배경으로는 우수에 찬 상처 입은 마음의 그늘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역설적으로 그 그늘의 막을 한 겹 제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서면 거기에는 또한 달콤함이 느껴졌다. 대금산조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해금 연주를 듣고 있음에도 어쩐지 대금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했는데 특히나 상청에서는 정말 대금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음반을 네 번 정도 들으면서 첫 청취에 눈물을 흘렸고, 하루가 지나서 이 음반을 다시 들으면서 또 눈물짓고 있는 나를 봤다. 눈을 감고 오롯이 현이 만들어 내는 소리에 집중할 때 느껴지는 다양한 감정들이 내 안에 버려진 채 잊혀지기 위해 애쓰던 오래된 슬픔들을 끄집어내어 눈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물의 원천인 슬픈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는 것이 왜 나는 달콤하게 여겨졌을까? 가두어 두고자 했던 봉인된 기억의 자물쇠를 해제하는 것은 정말 고통만이 남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하다 보니 달콤함이 옅어지면서 내 감정의 물결은 해금의 선율 안에서 비통의 처연함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강남의 물줄기를 강江이라 칭하고, 강북은 하河라고 칭한다고 하던데.. 물은 물일 뿐인데 다른 이름으로 불리운다. 사람들이 정해놓은 명칭. 감정의 이름들 또한 사람들이 같다 붙여놓은 정의 들일뿐이다. 비통함의 강물이 흘러 마음은 해금과 함께 그리움에 도달한 것 같다. 강江도 하河도 모두 그저 물일 뿐이라면 우수, 달콤함, 비통함, 그리움 모두 마음의 다른 면, 다른 조각일 뿐일 것이다. 음악을 들으며 이런 생각에 빠져 들다 보니 그리움에 대한 어떠함이 문득 생각났다. 금나라 때 시인 원호문元好問의 <안구사雁丘詞>라는 시의 첫 구를 떠올려 보면 이렇다.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생사를 가름하느뇨?'
김용의 소설 「영웅문」에서 많이 등장한 시라서 7~80년대 생들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싯구가 될 거 같다. 

정이 무엇이어서 생사를 나눈단 말인가. 음악을 듣는 다는 행위는 지금의 마음을 어딘가로 나누어서, 평소 쓰이지 않던 감정을 북돋는 행위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정으로 죽음과 삶을 나누고 그리움으로 죽음과 삶을 나눈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의 허황된 몸짓만을 아닐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해 본다. 

해금의 소리가, 조윤경님의 연주가 누군가의 시간과 삶에 다양한 파장을 일으켜 감정의 표면을 울렁이게 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들뜨고 달뜬 오늘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냉정해질 것이고, 일렁였던 마음의 파고는 며칠이 지나면 또 망망대해의 고요함으로 잠들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일렁였던 내 마음의 달콤함과 비통함과 그리움들이 밀려오고 밀려와 하나의 섬을 만들고 언젠가 내 영혼이 그 섬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임을 믿는다. 이 한 장의 음반이 커다란 하나의 섬이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일으켜 세우는 연주와 노래들이 영혼의 섬을 쌓아가는 하나의 부자재가 되는 것은 당연함이 아닐까. 

원호문의 시에서 짝을 잃은 기러기는 죽음으로 슬픔을 대신했다고 한다.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며 지냈을까.. 그 그리움 떨쳐내고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올라야 하리라. 하늘 높이'* 말이다. 조윤경님의 올곧고 흠잡을 데 없는 해금의 소리들이 날개 되어 다시 날아올라야 하는 날의 날갯짓에 큰 보탬이 될 것 같다. 내가 오늘의 눈물을 기억한다면 꼭 그리 될 것 같다.

* (정태춘님의 '92 장마, 종로에서' 노래 가사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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