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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지은이 : 정세랑
펴낸곳 : 문학동네
분량 : 337쪽
2020년 6월 12일 1판2쇄본 읽음
너무 대중적으로 유명한 작가의 책을 선택하는 건 언제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뭐.. 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지도. 「1Q84」 를 유일하게 읽은 걸 제외하면 말이다.
정세랑 작가의 작품들도 내 의식 속에서 그렇게 자리하고 있었나 보다. 도서관에 작품이 많이 비치되어 있음에도 내게 선택받지 못하는 작품들.
「시선으로부터,」 가 도서관에 들어왔을 때는 보려고 했었던 기억이 있다. 누군가 먼저 대출을 해가 버린 탓에 보지 못하고 미뤄뒀었는데 2~3년이 지나서야 우연히 간택을 받았다. 중고책들을 읽기 전까지 도서관에서 책 빌려 오는 걸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깨고 빌려올 만큼 읽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문득 시간이 나서 들른 도서관에서 생각이 나서 빌렸다는 것은 의식 안에서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책에 대해 아무 정보가 없었다. 영화든 책이든 정보 없이 만나는 것이 더 큰 즐거움을 주지 않겠는가... 물론 실망하는 경우가 더 크겠지만. 어쨌거나 책 제목에 대해 내가 생각했던 건 사람의 쳐다봄에 대한,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의 벗어남? 같은 걸 상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책을 열자마자 나의 상상은 보기 좋게 어퍼컷을 맞고서 KO 당했지만.
책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 예술계 평론가인 심시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녀로부터 이어진 그녀의 딸들과 손녀로 이어지는 여성의 가계 안에서 남성들은 조금 바깥에 밀려서 있다. 그럼에도 완전히 밀려 있지 않는 끈으로 이어진 서사 안에서의 밀려남 같은 것이 있어서 보기에 좋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심시선에 대한 이야기... 시선으로부터 시작된 가계와 그 가계 안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지만 여성 인권이 많이 신장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성이 세상의 주체가 되는 세상은 아직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기존 부계 사회의 관습에 젖어있는 사람들의 비판 어린, 날 선, 폭력적인 쳐다봄(시선)에 대한 중의적 의미의 제목인 셈이라고 생각됐다.
줄거리등은 여기저기에 워낙 많이 열거되어 있을 테니 넘어가 본다면 제일 감탄한 건 작가의 능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작가의 머릿속에서 빚어지는 작은 세계. 하나의 작품은 또 다른 우주다. 손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글의 폭력적인 흡입력은 과격한 문장에서 나오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야기의 힘. 이야기는 인류 최고의 전승물이다. 그 전승물의 발현을 이렇게 유려하고 감탄스럽게 그려낼 수 있는 작가가 동시대의 사람이라는 게 자랑스러울 그런 작품으로 기억 속에 남을 것 같다. 하나의 현대 소설이지만 작가가 창조하는 또다른 세상이기에 이건 SF로도 보인다.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을 것만 같은 문장들. 마치 AI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을 넣어서 이야기를 만들어 달라고 입력했을 때 나올 것만 같은 출력물. 왜 정세랑 작가가 이 시대에 많은 이들에게 호명받는 작가인지를 온전히 깨달았다는 것에서 이 책의 큰 가치를 발견한 듯하다. 특히 한 개의 챕터마다 시작을 심시선 여사의 글이나 연설등에서 발췌한 글을 (소설상 창작물이지만) 서두에 싣고서 그 이후 남은 그녀의 후손들의 현재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 서두 글에서의 심시선 여사가 했을 법한 이야기라고 작가가 전하는 글이나 메시지들이 너무 좋았다. 잘난 체하지 않고 너무 멋진.. 그래서 비현실적일 문장들이 아닌 것들을 선택하고 빚어내어 독자에게 전달하는 작가의 역량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랄까.
6.25 때의 비극으로부터 먼 시간이 흘러 하와이에서의 10주기 제사상을 차리는 한판 소동극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 그 시간의 간극을 메우는 이야기의 힘을 통해서 우린 또 하나의 오늘을 마주하고 또 하나의 내일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내일이 비록 비현실적 이거나 그냥 오늘 하루 같은 내일을 꿈꾸는 것일지라도 세상을 알고 있다고 자만하지 말라는 심시선 여사의 소설 속 말 한마디 기억하고 맞이한다면 그 모든 게 꽤나 무료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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