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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통의 치약, 그 끝을 짜내어 거품이 잘게 일도록 구취냄새를 닦아내 본다. 하얗고 파란 그 약품을 한 통 거덜내도록 세상안에 냄새나지 않는 말을 얼마나 내어놓았을까. 믿어 의심치 않는 미백의 언어들이 보이지 않는 악취로 오염이 되있었던건 아닐까? 내일이면 또 한통의 치약을 사러 동네 가게에 들를 것이다. 이제는 제발 더럽지 않은 말들을 세상안에 뱉어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나의 볼펜, 언제나 그 속에 들어있는 잉크가 다 떨어지기도 전에 볼펜 끝의 볼을 망가뜨려서 못쓰게 되기 일쑤다.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그러하다. 그 사람에게 해야할 말의 잉크를 다 소진하지도 못한 채 쉽게 식상하고 오해하고 다투고 그래서 관계의 볼을 조급스럽게도 끝장내 버린다. 하나의 볼펜 속에 들어있는 잉크가 종이에 다 옮겨지도록 토해낸 생각들이 사람의 맘에 생채기를 내지는 않았을까 걱정해 본다. 이제는 볼펜 끝의 볼을 좀더 조심스럽게 다뤄야겠다. 내일이면 또 한 자루의 볼펜을 사러 동네가게에 들를 것이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생각들의 아우성을 잠재워야겠기에. 그리고 더이상 생각이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아야겠다고 기도하기 위해서.

하나의 지우개, 찌그러진 양철필통 속에서 젤 많이 아파한다. 뛰고 구를 때마다 젤 많이 움직여 부딪혀야 하므로. 정작 지워야 하는 것을 지우기보다는 지우개 따먹기의 놀이기구로 전락하거나 의식의 적자로 취급받아 어느 구석에서 먼지와 함께 생을 마감하기 일쑤다. 사람들은 삶에서 지우개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한다. 하지만 정작 필요로 함을 느끼기 전까지 절대로 자신이 한 말들을 지우지 않을 거라 자신한다.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같이 있고 싶다고.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말들을 지우고 싶을 때가 삶속에 있다. 삶이란 그래서 비참한 건지도 모른다. 지우고 싶은 것들을 지울 지우개를 절대로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지. 때론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랑의 종이로 과거를 덮기도 하지만 가을날 낙엽을 휘감아 올리는 작은 바람에도 지우고 싶던 기억은 떠오르기 마련인 것을. 하지만 우리 누구라도 그게 필요하기 전까지 그것의 소중함을 모른다. 그것이 사람의 운명인가보다. 내일이면 또 하나의 지우개를 사러 동네가게에 들를 것이다. 하지만 필요로 하는 지우개가 현실의 가게에는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기도를 해야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의 어린아이처럼 무릎을 꿇고 지우개를 달라고 말이다.

하나의 전화기, 사람이 만들어낸 가장 악마 같은 존재다. 언제나 자신의 벨소리로 사람을 뛰어다니게 만드는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황제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 언제나 그 앞에서 사람을 한없이 기다리게 만들지만 기다리는 이에게 벨소리는 잠속의 꿈에서나 찾아온다. 가위에 눌려 꿈을 깨고 그것이 현실인양 착각한 채 시커먼 수화기를 들어올리면 거북한 "라" 음과 그 뒤에 "다이얼이 늦었으니..."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뒤따른다. 새벽에 듣는 그 소리들의 향연은 지옥에서 악마가 만들어낸 축제의 소리처럼 다가온다. 진땀을 흘리며 덜컥 수화기를 내려놓고 안도의 한숨을 쉬면 귀곡성 같은 벨이 정말로 울린다. 손을 떨며 조심스레 수화기를 들면 이런 말이 들려온다. "내일이면 날카로운 면도칼을 사러 동네가게에 들를 것이다." 그렇지만 면도칼을 사들고 악마의 생명선을 잘라버릴 용기가 나지 않을 것이다. 기다리는 소리가 언젠가는 그 안에서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리라. 그래서 전화기는 사람에게 황제다. 자신의 호명하는 소리에 인생이 부풀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기도는 무의미하다. 누구나 그 기대를 결코 저버릴 수 없기 때문에.

한 통의 커피, 친구인가? 적인가? 사랑하는 기억과 공유하는 한잔의 커피는 생명수이고 친구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한 통의 커피를 나눠마셔도 기억은 현실이 되지 않는다. 더욱더 먼 과거로 도망칠 뿐이다. 재깍거리는 불면의 초침소리와 함께 한발자국씩 말이다. 한때 시인 박인환은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라고 노래했지만 지금 한잔의 커피를마시고 우리는 누구의 생애와 무엇을 타고 떠나간 누구의 옷자락에 대해서 얘기해야 하는 걸까? 불면의 밤마다한잔의 커피는 분명 적敵 임에 틀림없다. 하룻밤에 하나씩 우린 적을 만들어가고 있다. 언젠가는 그 적들의 혁명아래 사랑해야 할 모든 것들과 기억해야 하는 모든 것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 통의 커피의 밑바닥을 보며 우린 친구라 믿고 있다. 그리고 내일이면 또 한 통의 커피를 사러 동네가게에 들를 것이다. 아직 우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에는 젊기에, 그리고 사랑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고 기억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기에 한 통의 커피를 친구라 믿어 의심치 않도록 기도하면서.

98년 6월 3일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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