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Essay & Poem & Etc

신 권주가 (新 勸酒歌)

빨간부엉이 2009. 2. 18. 09:23

신 권주가 (新 勸酒歌)

달빛이 머리위에 따라다녀 긴 마음의 산보에 뽀얀 농무와도 같은 아름다움이여.

멀어도 좋고 가까워도 좋은 그대 모든 것에 대한 회상으로 안주삼아 이 길고도 긴 아름다움 속에 내 마음의 벗 그림자 상석에 모셔두고 하석에 걸터앉아 농무주 한 잔을 청해본다.

일배 (一杯)

사람을 산이라고 생각하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자네는 이제 겨우 산 중턱에 와있는 거라구. 벌써 그렇게 지치고 숨차하니 이 산을 어찌 넘겠는가.

이배 (二杯)

세상시 이치 모두 순리대로 흘러가는 걸세. 남자는 늑대고 여자는 여우라 하지 않던가? 자넨 자네를 순한 양이라 생각하고, 지금 안주가 되고 있는 존재를 토끼라 생각하지? 에이! 여보게, 내 보기엔 둘 다 천하에 없는 늑대와 여울세 그려.

삼배 (三杯)

눈을 들어 거리를 아주 잠깐만 응시하세나. 그래, 지금 거기 자네가 찾는 전통이 눈에 들어오는가? 모든 것은 변하네. 때론 이상을 접고 현실에 순응할 필요도 있어. 사람들의 눈총과 험난한 언어의 화살이 날아올 때 전통이란 갑옷으로 방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타협이라 생각지 말게. 비굴해도 처세하는 방법이라 생각하게. 세상은 꿈을 지켜주진 않아.

사배 (四杯)

어려서는 바른 생활을 배우고 우린 커서 국민윤리를 배웠네. 그게 합당하다 생각하는가? 바르게 사는 법을 배웠고 의식이 들어차서 윤리란걸 배웠다면... 뭐라구? 아냐, 그런 종교적 관습에 대해서 얘기하자는게 아닐세. 난 말일세. 두가지가 역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엉망인 세상 모든 것을 생각해보게. 바르게 사는게 그렇게 어려운 거라면 왜 먼저 가르치는거지?

오배 (五杯)

남을 위해 그렇게 애 쓸 필요 없네. 길가의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누가 뇌진탕으로 저 세상 갈 것 같은가? 내가 보기엔 그거 버린 놈이 미끄러져 코가 깨질거라구. 또 아니면 어떤가.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 썩어질 가치에 모든 것을 걸지 말게나. 자네가 좀 손쉽게 세상을 살아갔으면 싶구만.

육배 (六杯)

좀 취하는군... 정치가, 사업가, 운동선수, 교수, 작가. 뭐 다 좋아. 근데 그 놈들은 왜 맨날 베껴먹는거지? 이놈이 한 걸 저놈이 자기 것처럼 쓰고 트집잡고 싸우고. 자넨 항상 변하지 않는게 좋다구 그랬지? 그러면서도 늘 새것만 찾아다니지. 자네 행동의 그릇됨을 뭐라구 변명할텐가. 베껴먹기 싫어서? 금방 싫증나서?

칠배 (七杯)

자넨 여우가 영원할거라 생각하는가? 언젠가는 구미호가 될걸세. 그때 여우 목도리를 만들건가? 늑대사냥이나 안 당하면 다행일 걸세. 어린왕자의 여우 아는가?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고 싶어 했던 내 마음의 표상일세. 자네 마음에 담아 두기 위해 그렇게 애 쓸 필요 없네. 말도 많이 하려구 애쓰지 말게. 진실은 말 안에 있는게 아니니까. 산은 올라갔으면 내려가라구 있는 것이지 거기서 죽치고 살라구 있는게 아닐세 그려. 여우가 그때 울안에 있고 싶어하지 않거든 그냥 그대로 두게나. 자유의 이름으로 늑대에게나 여우에게나 편해야 하지 않겠나? 불편하게 작은 옷을 억지로 입을 수는 없는거니까.

이런 혼자 지껄이다 보니 술이 다 떨어졌군. 자네 날 좀 업고 가세나. 취하는 걸. 달빛이 좋구만 그려.

달빛 아래서 그림자는 일정했다. 우리가 만든 세상 아래서 그림자는 길어지고 짧아지고 내 앞에 있다가 내 뒤에 있기도 했다. 마치 마술사 '후디니'를 보는 것 같았다. 세상 아래서 달빛이 그리울 때 내 그림자는 그래서 술을 마시나 보다. 마술을 부리고 싶어서 말이다.

98년 사월의 마지막 날에.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