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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것에 불이 꺼진다

멀리 보이는 것에 불이 켜진다. 빨간색 벨벳 커튼 사이로 언뜻 눈이 내리는 것이 바라다 보인다. 스쿠루지 영감이 유령 마레를 만나고 있을까? 성냥팔이 소녀가 지포라이터를 바라보며 상상의 생크림을 먹고 있을까?

멀리 보이는 것에 불이 켜진다. 하인리히의 발자국을 따라 브레드가 현재의 티벳에서 과거의 달라이를 만나고 우린 먼지 자욱한 천국안에서 허상을 본다. 그걸 진짜라고 믿듯이 팝콘을 입안 가득 우겨 넣으며.

멀리 보이는 것에 불이 켜진다. 혁명의 기치를 내걸고 가난한 영혼들은 불안을 잠식시켰다고 장담했지만 100년을 넘기지는 못했다. 한 세기를 이어가지도 못할 이념에 모든 것을 건 인간의 우매함이 낳을 결과는 전쟁과 죽음과 배고픔. 그것 뿐이었다.

멀리 보이는 것에 불이 켜진다. 콩쥐는 팥쥐를 시기하고 나무꾼은 도끼에 대해 거짓말을 했고 캔디는 이라이자를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선한자는 망하고 악한자는 흥한다는 속된 진리를 누가 만들었던가. 보이지도 않는 불이 켜졌다고 외친 양치기 소년에게 우린 시방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던가.

멀리 보이는 것에 불이 켜진다. 믿는 것들을 믿지 말고 믿지 않는 것들 또한 믿지 마라. 먼 훗날 누군가의 이런 연설문이 위대한 명구가 된다 할지라도 우린 하나도 놀라지 않겠지. 우리 현재의 거울일테니까.

멀리 보이는 것에 애초에 불이 없었다. 환하였고 또한 이곳도 환하였다. 민들레가 홀씨를 뿌려 세상에 퍼져도 이곳의 민들레도 저곳의 민들레도 단지 같은 민들레일 뿐이다. 거짓의 망령이 혼령을 흔들지라도 네 발 아래의 잡초 한 뿌리와 구르는 돌맹이 하나의 진실을 믿어라. 멀리 있는 것은 단지 멀리 있는 것일뿐이니까.

98년 1월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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