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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 Poem & Etc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3-3

빨간부엉이 2006. 3. 19. 22:20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3-3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Ⅲ-3 또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 대하여 4부.

프랑소와 트뤼포는 영화에 대한 사랑을 삼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첫째가 같은 영화를 두 번 이상 보는 것이라고 했고, 두 번째는 그렇게 본 영화에 대한 평을 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해서도 영화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자기가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정보의 홍수와 그 홍수를 다스릴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도대체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얘기해야 하고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가끔 지도를 놓고서 찾아야 할 만큼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무난한 주류의 의견에 편승하여 한 세상을 조용하게 살아가는 방법도 있으며 소위 말하는 사회주의적인 개념에서의 좌파를 떠나서 이제는 다수의 의견에 대한 반론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는 의식의 소유자들의 생각을 추종할 수도 있고 스스로 그런 현대적 좌파 계열의 새로우면서 답습적인 의견 개진의 핵에 자신을 위치지울 수도 있습니다. 그건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누구나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며 아주 가끔은 의무가 되기도 합니다.
트뤼포의 영화 사랑에 대한 삼단계의 방법을 지금 여기 속에 대입시켜야 봐야 하는 이유는 첫 번째의 방법론이 누구나에게 이제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중첩적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현상과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디스플레이(display)적 이야기들, 바로 이웃들의 치부까지도 말이죠. 그렇지만 문제는 그렇게 반복되어 재생되는 매일 매일의 이야기들 속의 감추어졌거나 드러나 있는 다의적이며 단선적인 의미들에 대해서 우리는 이제 생각하기를 짐짓 포기해 버린건 아닌가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직업적으로 그런 생각들을 대신 해주는 평론가들이 주요 일간지의 사설들을 현학적 어투로 가득 채우고 있으며 생각하기를 포기한 다수는 술자리에서 또는 토론의 장에서 남의 것을 읽고 자신 안에서 학문적으로 갖추어지지 않은 의견들을 마치 자신의 것인양 목소리 높여 얘기하고 그 속에 사람을 흡인하는 카리스마 마저 갖추고 있다면 남의 것을 진정 자기의 것인양 도둑질하는 비양심으로 사람들을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지금 트뤼포의 두 번째 단계를 여기에서 그릇되든 올바르든 대입시켜 실천해야 하는 이유가 더욱 강력하게 제기되는 우리 속의 필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섣부른 감상으로 세상을 바꿀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세 번째의 방법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또한 많은 것이 지금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봅니다. 학제(學製)가 이유가 있어서 설치되고 운영되기에 건너뛰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모든 것의 결과는 그 안에 스며들어있는 과정의 결정체 이기에 지금 영양분이 결핍된채 우리 주위에 산재해 있는 무수한 결과물들이 생각의 편식을 통해서 그렇게 삐그덕 거리는 것은 아닌가 그런 혼자만의 생각을 해봅니다.
원래는 Ⅲ부의 이야기를 네 개의 장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려고 했었는데 생각을 펼치는 능력이 부족한 탓인지 네 번째의 장을 분해시켜서 세 개의 장안에 섞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뭐 특별한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왠지 미진한 마음에서 이렇게 사족(蛇足)을 붙여서 모자랐던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들과 빠졌던 것처럼 여겨지는 얘기들을 또한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들은 아주 단순하며 현상과 생각 그리고 대안이라는 몇 개의 카테고리(category)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미진한 사고체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언젠가 어떤 이에게 보냈던 편지에 적었듯이 그릇이 아직 가득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미완의 그릇 속에서도 누구나 할 얘기는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지금 그런 얘기들을 하고 있나봅니다.
트랜디(trendy)에 순응하는 방송의 역할 수행과 그 수행의 마약과도 같은 극단의 현란함에 이끌린 청소년들의 의식이 가수를 지향하고 백댄서를 지향하고 방송국 프로듀서가 최고의 직업으로 선택받는 지금은 과거 세상이 정치에 휩쓸려 돌아갈때의 희망직업과는 너무나 달라져 있습니다. 세상이 그처럼 메스미디어의 역할 수행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게 들리는데요.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점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청소년들의 미래에 대한 의식이 미디어 지향적으로 획일화 되어 있다는 겁니다. 다양한 직업의 물결 속에서 꼭 하나의 물결만이 푸른 빛으로 빛나는 것처럼 보이고 그 빛을 향해서 자신의 꿈을 하늘색 꿈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개성이고 틀 안에서 벗어나는 분방함이라고 여기는 것은 분명 방송이 주는 폐단의 최악을 최선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경제한파 이후에 방송계에서는 호화 예산의 프로그램들을 자체적으로 삭제하기 시작했고 온갖 거품의 온상지였던 연예프로그램과 가요프로그램들을 삭제하고 과거 인기 드라마의 재방영등으로 그 빈 시간대를 충당하곤 했습니다. 그러함이 가능할 수 있었던 요인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립싱크 파동’ 덕분이었죠. 솔직히 상술의 피해자라고도 일면 볼 수 있는 십대가수들은 노래실력보다는 말끔한 외모와 기계적인 춤솜씨를 바탕으로 TV의 주 시청자층인 청소년들을 사로잡았던 거죠. 댄스일색으로 흐르던 대중음악계에 ‘립싱크 파동’은 노아시대의 홍수처럼 댄스만 가득한 가요계를 정화할 수 있는 놀라운 자정의 시발점이었고 그런 작은 시작이 이제 가요계에도 ‘국산사자 음미실체’의 구색을 갖추는 것이라고 흥미있게 바라보았던 것이 불과 얼마전 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위 다운타운이라고 호칭하는, 댄스와 댄스의 양념격인 발라드 계열의 가수를 제외하면 그 어느 누구도 방송의 이런 역할 수행이 오래 가지 못할 것임을 예상 했을 것이고 여전히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치는 것을 기피하는 현상이 지속됐으며 거기에 경제한파가 맞물리자 실력있는 가수를 섭외하기도 힘든데 차라리 방송계에서는 그런 시청률 확보도 안되는 프로그램을 제거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은 것이었죠. 거기에다 국가적 시류에 동참한다는 부가효과도 포함해서 말이죠.
어쩌면 그 두 개의 명분은 후자가 주이고 전자가 부일수도 있지만 그게 지금에와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방송 안에서 가요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고 업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에서 공존하던 실력있는 가수들이 아주 잠깐 브라운관에 등장하기도 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아주 잠깐이었고 국민들이 올랐다가 조금 내려간 기름 값에 -그래도 예전 보다는 훨씬 비싼데도 불구하고- 자가용을 다시 몰고 나오는 현상과 병행하여 가요 프로그램들은 다시 활성화 되기 시작했고 그 주류는 ‘립싱크 파동’때 숙청됐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댄스였습니다. 거짓말처럼 그 어느 매체에서도 이제 ‘립싱크’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았고 -방송 모니터보다 세상살이 힘든 요소가 너무 많았으므로- 잠시 유배지로 귀양갔던 댄스가수들은 더욱 현란한 몸짓으로 십대의 의식을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샘플링 기기와 각종의 음악적 효과들로 만들어진 노래들을 들고서 말이죠. 이런 지금의 현상 앞에서 작년도 ‘립싱크 파동’은 가요계의 정화가 아니라 댄스음악과 댄스가수들에게 어느 규제의 선을 명시해주고 질병에 대비한 백신주사를 맞게 해준 것 같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대중음악의 현주소이며 대다수 청소년의 의식을 몰개성의 획일화로 몰아넣고 있는 장본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여기에다가 일본문화 개방이후의 일본댄스문화가 양성화 된다면 어디에서 비틀려 나가고 있는 대중음악과 청소년 의식의 노선을 다양성으로 고쳐나갈 수 있을 것인지 정말 걱정이 되는군요. 그 고침의 철퇴가 전 국민의 동참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분명 국가의 총체적 위기의 재탕임은 분명할 것이고 자성적으로 댄스문화의 그릇된 점만을 추출하여 수정주의 노선을 걷는 댄스문화의 레지스탕스가 나오길 기다리는 것은 유토피아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허황됨일까요?
OEM(주문자 생산방식)이라는 용어는 의류업계에서 쓰이는 용어였지만 지금은 우리 나라의 만화 하청작업에서 고착화 되어버린 용어입니다. 일본이 지나치게 거대해진 애니메이션 작업을 자국내의 ‘아니메’ 제작 인원으로 충당할 수 없게 되자 배경터치등 많은 분량의 작업들을 외국으로 하청을 주는 형태로 이루어지게 되었죠. 그런 하청의 주요 작업국가가 우리 나라였고 그나마 그런 하청작업이라도 있었기에 주류권에 속하지 못한 우리 나라의 만화제작자들은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지만 그런 사실이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우린 해방후나 전쟁후나 한참동안을 미국과 UN의 원조물자를 받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고 지금은 문화적 원조를 일본으로부터 받아서 창작의지를 거세당한 만화제작자들이 그나마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조금씩 무언가 달라져 가고는 있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져 있는게 뭐가 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지금 여기에서 만화에 대한 의식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설정해야 하는 이유는 OEM방식이 주는 누적되가는 우리 만화의 ‘아니메 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TV를 통해 눈에 익숙해진 것에 덧붙여 직접 ‘아니메’작업에 동참하면서 그것이 손에 머리에 가슴에 누적되어 원래 자신의 펜터치를 무의식적으로 바꾸어 버린다는 거죠. 이것은 일본이 노리는 하청작업의 부가효과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자가증식하는 기생충같은 타국문화의 사대주의를 우리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신봉하는 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죠.
우린 언젠가부터 일본화된 만화이거나 일본만화이거나가 아니면 잘 그린 만화가 아니고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 아니라고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게 되는 시대에 봉착했습니다. 그 이유는 대중의 눈을 TV를 통해 그렇게 만들어 놓았고 지금은 하청작업을 통해 익숙해져버린 손끝으로 우리 것마저 그렇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경우 애니메이션은 필름 안에서 움직이는 물체들의 움직임으로 일본것과 타국의 것으로 양분이 됩니다. -지금은 거의 평준화 되었지만요. 기술적인 것은 얘기할 필요 없겠죠? 골치 아플 테니까- 그리고 화면의 느낌이나 사물들의 펜터치로 그 애니메이션의 탄생국가를 알 수가 있죠. 미국이거나 헝가리이거나 중국이거나 또 어디이거나 그 나라만의 이미지들을 화면과 그림에 투영하는데 우린 딱히 꼬집어서 우리만의 것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느낌도 없고 역동성도 없습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어떻게보면 당연한 귀결이지만 지금의 결과가 슬픈 것도 사실이지요. 그렇지만 슬픔의 속에 더하여 계속되는 그릇됨의 수행은 어떻게 멈출 수가 있는걸까요. TV안에서 점점 우린 창의력이 고갈된 일본의 것을 베껴오는 프로그램들과 마주칩니다. ‘현장체험’이라든가 ‘TV는 사랑을 싣고’라든가 ‘이경규가 간다’라든가 등등의 프로그램들이 일본의 것을 그대로 베껴온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들입니다. 우린 지금 일본이 식민지 시대에도 완전하게 달성하지 못했던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를 지금 여기에서 문화의 일체화를 통해 스스로 달성하려고 하는건 아닌지 점점 의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본문화의 개방이 공공연한 베끼기의 차단을 어느 정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이경규가 간다’라는 프로그램은 웃음과 개선이전에 우리 살아가는 사회를 블랙코미디의 온상지로 만들어버렸으며 말도 안되는 모순의 현상들을 스스로 자신안에 결박하여 우리에게 투영시키고 있으며 부조리와 부조리의 반복이라는 모순의 영겁성을 희화화하여 그 이념을 물화(物化)시켜 당연의 논리로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파행을 일삼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교통관계자가 나와서 80km로 가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60이나 70km제한 도로에서 속도를 준수하는 모범시민(?)을 찾습니다. 이건 모순일까요? 아닐까요? 의당 몇 십년전의 도로사정에 준거한 속도규제를 지금에도 적용하고 있는 것을 비합리적이므로 고쳐나가야 하는게 옳은게 아닐까요? 도로로 나가기 이전에 교통정책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는게 진정한 방향이 아닐까요? 고속도로가 완성이 되고 서울과 부산을 하루에 다녀갈 수 있다는 ‘일일생활권’이 천명된지는 무척이나 오래됐습니다. 그렇지만 요금을 지불해야 하거나 늘상 막혀있는 고속도로를 피해서 국도를 선택한다면 준법시민이 하루 이틀에 ‘일일생활권’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아마 딱지를 몇 개 떼고 벌점이 쌓여 면허취소를 당하는게 빠를 겁니다. 이러함들이 국가가 지향하는 모순의 현재형이며 그 모순을 합리화 시키는 것이 지금 전파매체의 영향력을 힘입은 방송의 역할 수행의 살아남기 위한 지향점입니다. 어쩌면 언제나 도착점은 살아남기와 살아남기위한 ‘자기검열’의 무서움을 깨닫는게 아닌가 싶네요. 점점 시류는 ‘재미’를 향해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말에서는 항상 웃음이 넘쳐나야 하고 대부분의 의식들은 이제 ‘썰렁함’이라는 말 속에 숨겨진 가면의 뒷면을 일부러 외면하려는 듯이 가볍고 일상적인 문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젊은 군상들은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의 첫 번째 요소로 ‘재미있는’ 이나 ‘유머러스함’을 꼽고 있습니다. 이런 시류 속에서 어쩌면 ‘한글’이 박대받는 지금이 당연한 논리일 수도 있으며 인간이 지닐 권리에 대해 연대하는 의식의 각성은 진정으로 썰렁함일 수도 있습니다. ‘표절’은 시류에 편승하는, 도둑질이 아닌 유행의 담합일 수도 있으며 ‘검열’은 사회의 근간을 지켜주는 의식있는 이들의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검열’은 사회의 근간을 지켜주는 이들의 노력에 대한 답례로 누구나가 행할 수 있는 선행일지도 모르며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일은 그들에게 ‘면죄부’를 선사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일본문화의 개방에 맞닥뜨려서 일본문화안에 자생하고 있는 ‘하드 고어’와 ‘하드 코어’의 자극적인 면에만 눈독드리는 일은 말초신경을 자극함으로 상업적 극대화를 노리는 일부 층의 노력으로 우리 경제를 활성화 시키는 일일 수도 있으며 우리 것과 우리 것이 아닌 것 또는 우리 안의 문제점과 해결에 대한 논의의 헤게모니(he-gem-o-ny) 쟁탈전이 진정 무의미하며 식자(識者)들의 시간 죽이기 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논의들을 그런 식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스크린 쿼터제’를 사수하려는 노력들은 물거품이며 등급외 전용관의 허가도 포르노를 양성화하는 요식적인 행위의 단면으로 매장해 버릴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속담에 ‘엉치뼈 깨진 소는 사돈에게밖에 팔아먹지 못한다’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스크린 쿼터제’가 정말로 엉치뼈 깨진 소를 우리외에는 팔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수하려고 한다면 ‘스크린 쿼터제’는 진정 구악이며 철폐되어야 마땅합니다. 등급외 전용관도 엉치뼈 깨진 소를 검열의 가위질 앞에서 피해가기 위한 수단이라면 당연히 불허(不許)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이 말을 상기해 보죠. 예비슬행(曳鼻膝行)이란 말은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에 나오는 말로써 양반 앞에서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코를 끌며 무릎으로 기어다녀야 하는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왜 갑자기 예비슬행이 생각이 났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들의 문화에 대한 의식이 마치 이와 같은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던가 봐요. 타국의 문화를 양반의 문화라 여기고 스스로의 우리 것을 하층민의 문화라 여기는 풍토가 3세대로부터 만연되면서 우린 지금 현대판 ‘예비슬행’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저 스스로에게 가끔 물어볼 때가 있었죠. 자성의 노력이 시작된지는 불과 몇 년이고 문화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 고조기에 들어선 건 더욱 가까운 시기의 일입니다. 지금 ‘스크린 쿼터제’가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우리 영화의 사수적 측면만이 아니라 타국문화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 문화의 적응력과 자성력을 키워서 동등한 위치에서 겨룰힘을 배양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앙드레 바쟁이 말했듯이 단편영화는 미래의 영화이고 지금 우리의 작은 것을 지켜나가는 일은 우리의 미래를 지키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 이런 시점에서 아쉬운 것은 과거 국민을 대상으로 만행을 저질렀던 위정자들을 퇴출시키지 못함이 한스럽게 여겨집니다. ‘반민특위’가 와해되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의 여기가 무척이나 달라져 있을 것임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문학계의 창녀라는 비아냥거림의 수식어가 붙여진 모윤숙은 일제시대때 우리의 처녀들을 정신대로 보내는 선동의 일선에 섰었지만 박정희정권에서는 장관까지 지내기도 했습니다. 열거하여 무엇하겠습니까 마는 고쳐져야 할 것이 고쳐지지 못한채 오늘에 이르렀슴이 지금을 만들어내었고 이게 우리의 전통이고 우리의 여기의 모습인 겁니다. 그렇기에 바쟁의 말처럼 작은 것들을 지금으로부터 압재의 입김으로 굴복시키지 말고 우리의 앞을 위해 키워나가야 하고 지원해야 하는게 아닐런지요.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N.하르트만의 말을 떠올려봅니다. N.하르트만은 예술작품의 구조를 층구조로 파악하였고, 작품을 그 존재의 양태로 본다면 실재적인 전경과 비실재적인 후경의 이층으로 형성되고 후경층은 다층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언제나 표피적인 현상에만 매달리는 관심의 집중을 다층구조적 이미지의 양성에 주력시킨다면 음악이든 미술이든 영화든 문학이든 멀지 않은 시기에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는 다분히 낙관적인 결말을 유도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때에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한 ‘스크린 쿼터제’적 제도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우리는 그날을 생각하며 기다려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 기다림이 싫다면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가 되는 수밖에 없겠죠.
지금 대문을 열고 나서면 온 길과 건물들, 가정집, 차량들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태극기를 사랑했던가 그 광경을 볼때마다 갑작스런 의아함에 직면합니다. 겨레 라는 말이 언제부터인가 무척이나 촌스런 뉘앙스를 풍기고 있고 해방후 올드랭사인의 멜로디에 맞춰서 불려지던 애국가의 후렴 가사에는 ‘대한사람 대한으로...’ 대신에 ‘조선사람 조선으로...’라는 가사가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흑 과 백, 적 과 청, 친공과 반공. 언제부터인가 우린 겨레대신에, 조선이라 불리우던 역사의 계승 대신에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양분화시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지금 우리 주위에 끊임없는 싸움터가 양산되는 당연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깃발’은 언제부터인가 원래의 의미를 거세당한채 이데올로기의 전위세력이 되어버렸습니다. 문학에서도 미술에서도 자유의 표상으로써의 ‘깃발’은 사라진채 이념의 나부낌만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 수없이 펄럭이는 태극기의 물결을 보면서 이제는 정말 ‘깃발’이 이념에 의해 자신의 원래 가치를 희생당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깃발’이 자유롭게 하늘 가운데서 펄럭일 때 진정 지금 여기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시작과 도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더 이상 다른 생각들로 고통받는 이들이 생겨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싸움터’가 자연스럽게 소멸하게되는 날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날 백두산과 한라산 정상에서 나부끼는 태극기가 아닌 ‘깃발’의 펄럭임을 우리 같이 상상해 보기로 하는건 어떨런지요.
‘깃발’에 자유를, ‘생각’에 자유를, ‘지금 여기 우리’에게 자유를.

Text : Minerva's Owl (9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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