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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 Poem & Etc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3-1

빨간부엉이 2006. 3. 19. 22:19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3-1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Ⅲ-1 또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 대하여 2부.

※ 위의 이미지는 다큐멘터리 와 하늬영상의 몇가지 이미지를 조합한 것입니다.

▶지금 여기는 일방통행

모든 것에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두가지 이중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레리 플린트〉를 보면서 떠오르는 것은 우리 나라가 보장하고 있는 권리라는 측면에서 과연 동전과도 같은 이중의 체계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먼저 떠오르는 것을 단지 우리의 현실이니까 인정하고 수긍하는 것으로 그 의문점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식 속에서 8.15 특사로 나오게 될 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소위 ‘양심수’와 전년도의 ‘사전심의는 위헌’이라는 판정으로부터 제기된, 그러면서 오히려 더욱 강화되고 그 검열의 폭이 더욱 확장세에 있는 보이지 않기를 바라면서 너무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검열의 문제와 이 모든 논란의 현장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깨우쳐 주고 각성하게 해주는 영화의 현주소에 대해서도 조금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적어도 지금 여기 우리에게 있어서 언제나 공식적으로 제공되어야 하는 이중의 체계 -국가와 국민, 제한과 보장- 는 항상 그리고 봉건주의 시대로부터 민주주의 시대라는 현재까지도 변함없는 일방통행의 논리로 억압받고 대국민의식의 조장으로 때로는 지탄받고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은 공권이라는 무력으로 탄압 받아왔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언제나 누적이 되게 마련이죠. 그 누적이 단단해지고 깨어지지 않는 현실이 되어서 일방통행의 노선이 항구적(恒久的)으로 양방향 통행이 가능해졌으면 하는 작은 바램과 생각으로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인권영화제’ 그리고 ‘인권(人權)’

뉴스를 잘 보시는 분들은 익히 아시고 계시겠지만 -전 뉴스를 거의 보지 않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인권운동가이자 인권영화제 대표였던 서준식씨가 이적표현물 -일방적 주장-인〈레드 헌트〉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는 사건이 전년도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일까요? 아직도 우리에게 국가는 레드콤플렉스안에서 모든 것을 사유하고 행동하고 정체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요? 〈레드 헌트〉를 제작한 부산의 ‘하늬영상’에서 말하기를 자기들 스스로도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교과서적이다, 너무 약하다 라는 자체적 평을 내리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만들었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2회 부산 영화제에서 두차례에 걸쳐 상영된 〈레드 헌트〉에 대한 관중들의 제의(題意)조차도 하늬영상과의 동일된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게 현실 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한 그루의 나무 때문에 그 나무는 어쩌다가 숲이 되어버렸고 아직도 서슬퍼렇게 살아있는 국가보안법은 이적물이라는 빨간 물감을 씌워 한 그루의 나무를 이데올로기 안에 박제(剝製)시켜 버렸습니다. 그건 장산곶매의 〈닫힌 교문을 열며〉가 93년부터 시작하여 97년 10월에 거두는 승리인 ‘사전심의는 위헌이다’라는 판정의 결과가 아무 필요도 없는, 오히려 거두지 않은 것 보다 못하게 되어버리고 마는 지금의 현상을 낳은 서곡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공윤’이 ‘공진협’으로 바뀌고 승리의 순간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모여 영화 투쟁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파업전야〉를 전경의 군화발 소리를 코러스 삼지 않고서도 조용하게 그리고 정말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희망에 부풀어서 새로운 시대의 한 페이지 속에 동참한다는 기분으로 관람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결과는 어떤가요? 서준식씨는 이미 70년대부터 ‘양심수’라는 명찰을 달고 20년간 ‘큰집살이’를 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석방되어 93년부터 팩시밀리신문인 〈인권하루소식〉이 이제 지난해 11월에 1000호의 소식지를 발간하는 성과를 이루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의 현실을 아주 단적으로 보여주는게 아닌가 싶어요. 정말로 공권이 주장하듯이 우리나라에 ‘양심수’라는 존재가 없다면 〈인권하루소식〉지 같은 신문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겠죠.
이미 2회 인권영화제의 사전 검열을 무시한 상영으로 영화제 자체가 상영불가의 불법적 행동의 장 처럼 되버린데다가 양념처럼 가미된 이적물의 상영강행으로 그 자체가 이미 나무를 봐야하는 상황에서 숲만 멀리서 응시하는 결과를 낳아버렸습니다. 2회 다큐멘터리 영화제는 갑작스런 두편의 상영물 - 〈레드 헌트〉와〈태평천국의 문〉- 의 취소로 하지 않으니만 못한 행사가 되어 버렸으며 인권영화제는 본격적인 탄압의 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미 대학이라는 교두보 조차도 그들의 은신처가 되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건 3공화국때 고대 대학생연행과 위수령 발동으로 인한 대학내 군 상주로 멀리서 그 근원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대학을 등에 업고 강행하고자 한 인권영화제는 대학측의 강제적 전기차단으로 발전기를 돌리며 -홍익대에서- 상행하는 등 난항에 난항을 거듭하며 힘겹게 진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나마 몇 백명이나 몇 천명의 인원등이 관람하던 영화제에서 가장 최악의 사태는 작년 10월 5일 민예총 강당에서 상영예정이던 끌로드 란쯔만 감독의 9시간이 넘는 유태인 대학살에 대한 그후의 기록인 다큐멘터리 〈쇼아〉의 상영이 경찰서에서 아침부터 시작한 불심검문으로 50여명 만이 관람을 하는 최악의 지경까지 이르렀었죠. 그리고 같은 달 서준식씨에 대한 경찰서 출석 요구서가 31일날 발송이 되었습니다.

▶4.3항쟁은 빨갱이 사냥이었으며〈레드 헌트〉는 이적물이다?

〈레드 헌트〉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우리에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으며 도대체 왜 공권은 무슨 얘기를 하고 있길래 그렇게 기를 쓰고서 막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현대사에서 규명되지 못한 많은 얘기들중의 하나인 4.3에 대한 얘기가 들어있습니다. 광주의 5.18로 시작하는 역사의 새로운 모습들은 이제 미완적이며 왜곡적일지언정 작은 시작을, 작은 성과-5.18국가기념일 제정- 를 거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전에야 시작된 4.3에 대한 조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철저한 암흑속에 갇혀 있습니다. 4.3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겨우 화가 강요배의 그림이나 몇몇 시인들의 시속에 갇혀 있습니다. 실상을 못 보고 있다는 거죠. 그 단적인 증거가 4.3때 학살당한 제주도민들의 숫자가 3만에서 8만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통계에 나타나 있죠. 3만에서 8만이라니? 도대체 5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3과 8사이의 5만이라는 숫자가 좁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걸까요? 역사가, 진실이 우리 앞에 다가서는 것이 국가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치명타를 입힐 만큼 그렇게 두려운 일일까요? 전 가끔 도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고 어디서부터 뭐가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익히 알고들 계시겠지만 4.3항쟁에 대해서 잠깐 그 역사를 개괄적이나마 짚고 넘어가볼까 합니다. 먼저 알고 계실건 이때가 미군정의 시절이었다는 거죠. 48년 4월이 있기전의 45년 9월 22일에 좌우연합적 성격의 통일전선체인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 위원회는 당시 제주도민의 민의를 실질적으로 대변하는 대의기관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군정과 대립상태로 들어가게 된 것은 47년 3월1일의 3.1절 기념일에 대회를 끝낸 도민들 -당시 28만의 제주도민중 3만여명이 모였다고 합니다-을 향해 경찰이 발포를 하여 6명의 사망자와 8명의 중상자를 냈던 것이죠. 그렇게 파업이 시작되고 미군정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동원하여 탄압을 시작했고 1년여 동안 2천5백명을 구속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련의 사태들이 4.3의 실질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죠. 그러면 좀더 상세하게 전 ‘제주 4.3연구소장’으로 계셨던 김창후씨가 신문에 기고했던 4.3항쟁의 과정이라는 글을 중요한 부분만 인용해볼까 합니다.
48년 3월에 접어들자 조천, 모슬포 지서 등지에서 3건의 고문치사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 그런데 때마침 유엔임시위원단의 입국과 남한만의 ‘5.10단선’ 결정은 -김구의 우파, 김규식의 중도파도 단선을 반대했다- 제주도민들로 하여금 더 이상 앉아서 죽을 수만은 없다는 의식을 공유하게 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48년 4월 3일 새벽 2시,... 1천5백명의 무장대들이 제주도내 14개 지서와 서청, 대청 등 우익단체 요인집을 습격함으로써 시작됐다. ... ‘5.10단선’이 임박하자 제주도 전역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 해변마을 주민들은 투표에 거부하여 선거 전날 밤 이불과 간단한 식량을 짊어지고 산에 올라갔다가 뒷날 선거가 끝난 후에야 돌아오기도 했다. 결국 5월10일의 단선에서 북제주군의 2개 선거구는 투표율 미달로 선거가 무효화되는 전국 유일의 사태가 벌어졌다. ... 그러나 항쟁의 이러한 부분적인 승리는 그후 약 1년에 걸친 군경의 대토벌과 대학살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주한임시군사고문단의 자문아래 군경합동의 대토벌과 학살작전은 단선직후부터 다음해 5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될 때까지 집중적으로 계속되었다. 특히 48년 11월 경부터의 소개작전 (유격대의 거점이 되고 있다며 중간산 마을을 불지르고 주민들을 해변 마을로 내쫓는 작전)결과, 엄청난 인명 피해는 물론 제주도의 1백60개 마을이 참화를 입게 된다. 이때부터 다음해 봄까지가 가장 많은 도민들이 -논자에 따라 3만에서 8만까지- 학살된 시기이다. 최근 발굴된 한 자료(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에서 49년 4월 1일 작성한 ‘제주도사태’)에 의하면 희생된 도민 중 최소한 80%가 군경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음을 미군정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

▶87년 6월 항쟁과 대선이 남긴 지금 여기 우리

우린 사실 왜곡된 역사의 틀 속에서 이런 사실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죠. 마치 X-File처럼요. 해방이후에 일본의 군국주의가 사라져 살만한 세상이 되었다고 믿었던 민초들에게 열강들의 이데올로기 싸움은 우리의 권리를 지켜내기에는 버거웠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버거움 때문에 우린 많은 것들을 놓치기 되었죠. 중첩되는 이야기지만 이승만정부가 거두지 못한 식민지시대의 구악(舊惡)들을 60년 4.19로 해결을 볼 수 있는 실마리를 가졌지만 5.16쿠데타로 모든 민주주의의 씨앗들은 세상에 움을 틔우지 못하게 되었고 애써 틔운 씨앗들은 열매가 되기 전에 가차없는 제거의 군화발을 맞이하여야만 했었죠. 그렇게 많은 시간들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기억속에 있습니다. 전태일의 분신, 박정희정권의 3선개헌 날치기 통과, 유신헌법의 기초가 됐던 국가보위법 날치기 통과, 사형수들을 테러공작요원으로 키웠다가 제거하려했던 반인륜적인 ‘실미도 사건’, 드라마〈모래 시계〉에서 고현정이 최민수의 도움으로 탈출하던 79년 가발공장 여공들의 노동투쟁, 최규하 내각의 하야와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 반미감정의 고조로 인한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사건 등등. 우린 그렇게 절반의 국가를 가진 것도 모자라 새로운 시대의 대부분을 탄압, 제거, 공작, 유린, 고문, 치사, 은폐, 투쟁 등의 듣기에도 소름 끼치는 단어들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들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87년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축소조작되었고 진범이 따로 있다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5.18 기념미사때의 발표로 인한 시발점으로 6월 항쟁이 시작되고 독재에 대한 자유의 권리를 언어로, 몸으로 주장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그 속에서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정말 박제처럼 되어버린 이름 - 이한열- 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름이 정말 자기가 원해서 였던가요? 정말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로서 어긋난 사상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자기의 이름이 그런 식으로 역사에 남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열망들이 진정 국민의 의식을 대변했던 것인가는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죠. 국민의 의식이 진정 군부의 독재를 종식시키기를 원했다면 어떻게 5.18의 주역인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3공화국이후 첫 직선제에서- 선출시킬 수가 있었을까요. 그건 아직까지도 도시노동자와 지식인, 학생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인간 그리고 인권이라는 어휘의 생소함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어요. 그런 의식의 전근대성이 불러온 결과는 중첩된 부정과 축재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지워진 굴레로 변해 지금 누구나의 등에 씌워져 있잖아요.

▶마음에 색깔이 있을까?

얼마 안있으면 또다른 의미의 8.15를 맞이합니다. 대선이 있기전에 야당의 대통령후보가 ‘양심수’를 언급하기 전까지 공식적으로 우리 나라에는 ‘양심수’라는 수인(囚人)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우리는 인권탄압국가의 표상이었고 그것은 96년도의 1천 2백여명이라는 숫자나 현재 9백여명이라는 숫자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양심수’가 없다는 것 또한 틀린 말은 아니었죠. ‘양심수’란 체제나 억압 속에서 신념에 따라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소신있게 발표하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볼 때 정부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이들의 주장이란 것들이 체제전복적이고 선동적이고 ‘국가보안법’에 위배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구금을 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양심수’가 없다 라는 발표가 가능했던 거죠. 한마디로 위법을 했다는 건데 왜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렇게 매일 같이 모여서 그들의 무죄를 주장하고 석방을 주장하고 신문을 만들어 찍고 발송하고 하는 일들을 하는 걸까요. 국가는 잘못했다고 하고 민의는 아니라 하고. 어디에 그 모순의 타협점과 해결점이 보이는 걸까요?
최근 재일교포 감독으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최양일씨의 95년도 인터뷰에서 보면 한국사람들의 의식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전향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어느 쪽에 속한 사람이다 라고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는 건지 놀랍다 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국민성일까요? 우린 항상 어느쪽에 손을 들어야 그 사람의 색깔을 구별하는 못된 관행을 계승해왔습니다. 조선시대의 붕당정치로부터 시작된 극우와 극좌의 싸움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나 분명한 노선속에 있어야 한다는 의식을 조장해 왔던거죠. 그래서 ‘양심수’들의 석방조건에 그런 ‘전향’적 조건들을 걸고 있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인해서 ‘양심수’들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거죠. 얼핏 뉴스를 보니까 -정확히 본건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 이번 특사때는 단순히 사회인으로서 사회에 물의를 끼치지 않는다라든가 회사에 들어가면 회사의 규칙을 잘 따른다는 서약서만 작성하면 석방이 가능하다고 하던데 이것이 바뀐 정권이 주는 해약인지 아니면 이름만 바뀐 중첩되는 독약인지는 8.15특사의 결과를 보면 쉽게 알 수 있겠죠.

▶‘독립영화’의 지금과 연대하는 우리

좀 길고 장황하게 얘기가 진행되고 있네요. 무슨 이야기들을 했었죠? 그래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었죠. 이런 모든 역사들, 사람들, 결과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필름에 옮겨 담고, 세상에 기록으로 남기고, 같이 연대하여 얘기하고 나아가기 위해서 싸우는 독립영화 단체들이 주위에는 많이들 존재합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이야기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들이 걸어온 긴 시간의 지난한 그림자를 우린 지금 겸허하며 비판하기 보다 수긍하는 자세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론 제작의 주체들은 언제나 강한 비판을 요구하지만요. 그런데 지금 갑작스럽게 영화가 담론의 중앙으로 등장하면서 독립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도 너무 잘못되어 있고 인식도 편향적이고 이념지향적으로 왜곡되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어쩌면 그것도 다 정권이 파생시켜준 결과의 한 부산물이긴 하지만요. 그래서 독립영화인들은 이제 스스로 자신들의 영화를 독립영화라고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독립영화가 뭐냐구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유통과 배급의 숙제를 스스로 짊어지고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닌가 싶어요. 기존의 체계 속에서 자본에 의해 영향받지 않고 자신들만의 체계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만든 영화요. 미국 같은 경우에 독립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가 주류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면 우리는 만들어진 어떤 매체마저도 사장시키는 독립영화의 식민지 시대 속에 있는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독립영화인들이 한국적 주류에서 독립하고 싶어하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거나 그들이 가치폄하적이고 대중적으로 되어버린 단어 ‘독립영화’를 이제 스스로 거부하기 시작했다는거죠.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우리에게 인식되어온 기존의 영화를 구분하는 준거(準據)틀의 파괴가 오기 때문이죠. 우리의 독립영화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기에는 아직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너무나 많고 넘어야 할 산도 너무나 많은게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아직은 좀더 그들이 분발하고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주기를 바라는 이기심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단지 이름 때문에 색깔이 바뀔거라고 단정하는 것 자체가 바보같은 일일수도 있겠죠. 왜냐하면 지금 그 어느 누구도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자신들의 역할이 필요한 사건들이 주위에서 비일비재하다는 무서운 현실 속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또한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몇몇의 대표적인 독립영화단체들을 알아볼까요? ‘인디라인’이 있습니다. 그들은 1회 서울국제독립영화제를 개최했고 〈놀랬지?〉와〈단편영화〉라는 단편을 그때 발표한 바가 있습니다. ‘문화학교 서울’하면 국내 최대 보유량의 ‘시네마 떼끄’로 유명하죠. 사람들의 머리속에 있는 모든 영화들이 그안에 거의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니까요. 그들이 이제는 단지 상영하고 토론하는 장을 벗어나서 직접 영화들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새가 없는 도시〉와 〈고스트〉의 단편. 그리고 ‘문화학교 서울’의 자본으로 〈김수영-Sex〉라는 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
‘서울영상집단’은 우리에게 굉장히 낯익은 제목의 영화를 제작한바 있죠.〈두밀리, 새로운 학교가 열린다〉가 그것인데 최근에는 〈변방에서 중심으로〉라는 영화를 통해 독립영화의 현주소를 스스로 묻고있는 굉장히 의미있는 작품을 만든바 있습니다.
‘청년’은 익숙한 이름들이 많죠. 특히 정지우 감독은 〈생강〉으로 3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었죠. 그들은 시스템 내부에서 생존하면서 작가주의 정신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이상적인 집단입니다.
‘보임’은 어떤 면에서 극영화를 제작하지 않으면서도 유일하게 독립영화 진영내에서 정규극장에서 상영을 가진 유일한 팀이죠. 기록영화제작을 주로 하고 있으며 〈낮은 목소리 -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2〉,〈낮은 목소리 2〉가 있습니다. 대표격인 변영주 감독은 여성이면서 남성적 분위기로 유명하기도 하구요. 〈낮은 목소리〉는 극장의 상영을 거치고 정신대문제를 현실적으로 제기하면서 독립영화와 그밖의 수많은 논쟁들의 중점에 항상 놓여있는 영화가 되었죠.
‘푸른 영상’은 〈상계동 올림픽〉이란 작품으로 우리에게 친숙하구요.〈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란 작품과 89년 6월 명동성당의 6일간 투쟁의 기록을 담은 〈명성, 그 6일의 기록〉이란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밖에 ‘독립영화협의회’라든가 〈파업투쟁 속보〉의 ‘노동자뉴스제작단’등이 사라진 ‘장산곶매’와 함께 투쟁속의 영화운동의 선두에 항상 있어왔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런 영화단체들을 이야기해야 함은 어쩌면 진정 무의미한 일일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린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싸움터의 변방에서 너무 허우적거리고 있는건 아닐까요? 때론 나 자신도 그러하였고 여러분도 그러했겠죠. 그렇기에 영화를 봐야 하고 지금 여기에 있는 이들의 이름과 의미에 대해서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는 우리 주위에서 아주 간헐적으로 이런 영화들이 찾아와줄 때 그 영화들을 같이 보고 동참해야 하는 최소한의 의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다른 이유는 비록 심의를 거부하고 가위질을 거부하고 그래서 위법적으로 보여지지만 우린 현실 속에서 ‘바른생활’만 하면서 살 수가 없지만 그게 양심에 비춰서 나쁜일이 결코 아닌 것들이 많은 것처럼 우리의 현주소를 얘기하는 기록을 보는 것이 결코 ‘바른생활’에 위배 -사전심의가 위헌판정난 마당에 이런 논의를 해야하는 이유도 포함해서- 되는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포함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뀌고 강화된 검열의 횡포에 있습니다.

▶단지 ‘검열’과 ‘심의’라는 이유만으로...

예전에는 ‘공윤’이 사전심의라는 이름으로 소위 말하는 가위질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공진협’이라는 단체가 생겨나서 심의유보제라는 오히려 검열보다 더 위압적인 결과들을 낳고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6개월 이나 1년간 심의가 유보되면 사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파산하게 되고 그렇기에 결국은 자기검열의 고통속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공진협’의 심사기준에 맞게 영화를 스스로 가위질 하는 것이죠. 이게 도대체 뭐가 달라졌으며 ‘사전심의 위헌판정’이 무슨 이득을 거두었단 말입니까. 영화인들은 말합니다. ‘공윤’의 심의를 피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의 검열기준으로 영화를 만드는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고 말입니다. 그렇게 장선우 감독의 〈나쁜영화〉가 자체적 가위질을 단행하여 상영을 했었고 ‘공윤’의 심의는 이현세씨의 장편만화 〈천국의 신화〉를 음란만화제작이라는 이유로 당사자가 검찰에 소환되는 촌극을 빚게도 하였습니다. 멀리 가지 않고서도 불과 작년에 있었던 우리 문화의 현주소를 얘기하고 있는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더 열악한 환경 -‘공진협’의 심의 유보제- 에 있습니다. 정권이 교체되었는데, 문화진흥법이 개정이 되었는데, 국가에서 영화제작비까지 지원하고 있는데 어째서 상황은 점점 더 악화일로에 놓여지는 걸까요. 그건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더욱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자본의 검열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자본은 국가와 결탁해서 국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늘 수정합니다. 그건 2회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천안문사태를 다룬〈태평천국의 문〉이 중국의 압력으로 인해서 삼성측에서 영화상영전에 갑작스런 취소를 하는 사태를 예로써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가의 권위는 예술과 문화를 그렇게 쉽게도 지배하고 있죠. 우리가 대만영화를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만요.

▶그래도 삶은 계속 됩니다

50년대 T.V가 가정에 배치되면서 헐리우드에서는 더 이상 대작영화들은 제작이 되지 않는 시대가 왔고 사람들은 이제 영화가 망했다고들 서슴없이 단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십년의 시간이 흐르고 지금 영화는 몇 개의 물결들을 지나 잠시 정말로 멸망하는 듯 보였지만 지금 세기말을 맞이하는 몇 년 사이 갑작스럽게 부활한 르네상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이제 세상은 점점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문화의식은 지나치게 봉건적이 아닐까요.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도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면서 쓸데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배치한 것 같아요. 그렇지만 지금 여기 우리의 모습 속에서 영화가 가진 힘, 더 확장하여 문화가 가진 힘을 십분 발휘하는 지혜를 지녀야 하는게 아닐까 싶어요. 곧 일본문화가 들어온다고 하죠. 그런 속에서 우리는 지금 청소년들의 만화를 규제하여 그들을 보호하고 미래를 지킬 수 있다고 그렇게 믿게끔 의식을 조장해 가고 있습니다. 작게는 만화에 대한 탄압, 크게는 문화에 대한 탄압이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주위풍경인 것입니다. 그러함들이 창의력을 말살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죽이고 우리의 미래를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영화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때론 아주 큽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을 보아주지 않는다면 무척이나 작아질 것입니다. 서준식씨로 대변되는 우리나라 ‘양심수’들의 문제, 해결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문제, 검열에 대한 문제, 지금도 생존을 놓고 싸우고 있는 이들의 투쟁의 문제 -지금도 명동성당에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이제는 나가줄 것을 요구하는 성당측 (추기경이 바뀌자마저 노선이 변한게 아니라 지금 현재 그들의 투쟁이 명분을 찾지 못하고 있는건 아닌지) . 이런 것들이 우리의 영화 속에 녹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에 대한 현실은 서구에서 들어온 공기 한 줌 통하지 않는 플라스틱용기와도 같습니다. 그 현실 속에 우리의 이야기들을 담을 때 언젠가는 숨이 막혀 죽고 말 것입니다. 어느 종가집에 가면 백년을 이어오는 간장이 있더군요. 그 간장이 살아서 맛을 전해주는 이유는 그 간장을 담고 있는 그릇이 옹기이기 때문이죠. 바로 우리의 그릇인 겁니다. 우리의 그릇은 그렇게 세상의 바람과도 공기와도 대기중의 먼지와도 조우(遭遇)합니다. 지금부터 우린 우리의 이야기들을 숨을 쉬는 옹기에 담아서 보존해야겠습니다. 밀폐되고 도식화된 서구의 이미지들로 포장해버린 우리의 의식과 국가의 권위를 씌운 랩을 벗겨내고 명주천으로 덮여진 우리의 냄새를 맡아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요.

Text : Minerva's Owl (98-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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