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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 Poem & Etc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2

빨간부엉이 2006. 3. 19. 22:15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2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Ⅱ. 또는 일기(日記)로부터 빠져 나오기.

지금은 새벽 한시 -초저녁이지 뭐- 고 얼마 남지 않은 기말고사를 위하여 책을 좀 보다가 머릿속에서 다투는 선과악 - 공부해야지 , 그냥 텔레비젼이나 봐야지. 과연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이 악인가? 고것이 문제로다- 그 대결의 전장(戰場)으로부터 도망나와서 편지 아닌 편지를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노래가 있었지만 이건 결코 사랑이 아니기에, 아니 어쩌면 너무나 큰 사랑하는 마음이겠기에 지워지지 않는 매체를 이용한다. 오늘도 또 변명으로 시작하고 언제나처럼 변명으로 끝나버릴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난 진실을 위하여 침묵할 만큼의 현자(賢者)도 덕자(德者)도 지자(智者)도 아니기에 감히 스무 줄이 넘는 내 일기를 공개한다.

초등 학생의 선생님 교체 요구에 따른 파문이 일파만파(一波萬波)로 커져가고, 여기에 대한 개인적 견해는 아이들에 대한 동정이었다. 나에게도 중학 시절의 이년간이 한 분의 선생님으로 인하여 그렇게 고통스러웠으니까 말이다. ‘PD수첩’을 보면서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입장에서 -최종적으로는-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발견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은 예전에도 그러하였고 지금에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하듯이 무덤 속에서 세월의 의미만을 자양분으로 하여 살아갈 미라가 된지 오래기 때문이다.

부모의 배후조정? 아이들의 자발적 교사 경질 요구?
어느 것이 진실이든 이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것은 어떤 공포영화 보다도 무더운 이 더위의 최고 납량물이 되어간다. 담임교사의 아이들에 대한 -사건 발생 이후- 비하의 말들 -이기적인 아이들, 거짓말만 일삼는 아이들-을 들으면서 아이들의 말이 신빙성 있게 다가온다. 아이들에 대한 체념의 어투가 아니라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선생님의 어투에서 설령 아무리 똑똑하고 세대가 변한 아이들이라도 아이들은 아이들일진대 그 아이들을 자신과 동격에서 싸잡아 비하하는 건 내 마음을 아이들의 의견에 기울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이라는 집단과 교사라는 개인의 감정싸움이 이제는 부모 대(對) 학교로 확장되어 버렸고 지금은 사회 대 교육관습의 쟁점으로 번져 버렸다. 중상모략에 대한 최대의 해결책은 진실이다 라는 말처럼 자신이 진실하다면 진실한 어느 한쪽인가는 해결을 위한 침묵을 견지하는 건 어떨까? 그 침묵의 대상이 군사부일체(軍師父一體)라는 경의(敬意)를 바치는 우리의 스승이라면 또한 얼마나 좋을까 싶다. 자신에게 배움을 얻어 가는 자식들을 그렇게 모질게 비난하는 스승이 침묵을 견지하거나 가장할 수도 없슴은 어쩜 이 상황에서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의외로 사람들은 쉽게도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망각에 대한 바램이 이 상황에서의 최선의 해결책일 수는 결코 없지만 진실은 자신의 믿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그 대상이 학생들이든 선생님이든 말이다.
980707 24:00 - 양호의 일기 중에서

지금은 980708속의 시간이다. ‘교육’과 ‘980707’하면 뭐 생각나는 거 없으신지...
그 두가지 만으로 맞추기가 좀 힘든가? 그렇다면 ‘나는 하여간에 환상 속에 빠져있는 너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이 밤이 깊어간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시대는 비록 유감스럽지만 “알아요”라고 매일 퉁명스럽게 외쳐대는 너에게 “넌 몰라 임마! 그러니까 집에나 가!”라고 말하리라. 이제는 내 모든 것인 너의 자유를 위해’ 이정도면 맞출 수 있겠지?
그래, 돌아온 황야의 무법자 태지에 대한 이야기야.
어설픈 감상주의에 빠져 스스로의 무덤을 판 한 소년이 이제 무덤 밖으로 슬며시 고개를 내밀려고 하고 있어. 그렇다고 해서 이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비오는 날 무덤을 파고 들어가 누워 자신의 분신을 위하여 나갈 결의를 다지던 ‘전태일’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야. 단지 미디어 안에서 왕자가 되었지만 미디어 밖의 세상에서는 왕이 되지 못한 채 왕권을 지키기 위한 이방원에게 철퇴를 맞고 피흘리는 한 힘없는 신하가 되어버렸었지. 아마도 서태지가 양녕대군 처럼 현실을 파악하고 대권에서 물러서기 위해 노력했다면 공륜의 ‘서태지 죽이기’와 그로 인한 ‘십대들의 대통령’이라는 칭호로 인한 중압감에 못이겨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들어가는 어리석음을 행하지는 않았을거라 생각해.
서태지의 측근들은 음악에 있어서 그를 천재라 부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저 음악적 감수성이 뛰어났던 재주꾼 정도로밖에는 여겨 줄 수가 없어. 서태지의 팬들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에 선하지만 난 적어도 그의 음반들에 대해서 상당히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만약 내가 신해철에 대해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면 절대로 객관적으로 그에 대해서 얘기 하지는 못할거야. 난 부인할 수 없는 ‘해철당’의 ‘당원’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서태지가 인기가 절정에 있던 순간에도 칩거한 순간에도 난 그저 그를 음악으로 만 보아왔으니까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해.
그나마 서태지에 대한 내 개인적 평인 음악적 감수성이 뛰어났던 재주꾼이라는 말조차 두 번째 음반까지에 한해서고 그나마의 인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그 뒤 두장의 음반의 가사들이 서두에 언급한 어설픈 감상주의에 빠져있는 그를 느끼게 했었어. 왜 그런 줄 알아? 그건 결정적으로 도망갈 수 없는 댄스가수라는 선입관 때문이었지. 단지 선입관 때문에 그렇게 바라보는 건 분명 아니야. 지금 활동하는 가수들 중에 제대로 된 가사를 쓰는 싱어 송 라이터는 약 네명 정도로 -내 견해에서- 꼽을 수가 있는데 서태지가 그 반열에 들어서고자 했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라고 할까.
얘기가 주제 -싸움터에서 생각하기-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데 주제는 그거였지. 왜 의사를 번복하고 음반으로나마 돌아오느냐에 대한 찬반양론. 그건 완전한 ‘컴백 코리아’를 위한 포석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의문. 그 주제에 대해서 음반 컴백 이브로부터 어제까지 좀 생각을 해 봤는데 음악인이 음악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 절대로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 예전의 은퇴선언은 자신의 의사절반에 세상이 만들어준 의사절반이 합쳐진 거라 생각하거든. 사람의 생각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서 변하는데 단지 서태지의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서 그를 다시 설전(舌戰)의 싸움터 한가운데 던지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거라 생각해. 물론 은퇴가 한때의 실수였음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는 없지만 지난 몇 년간 다시 음악을 만들었을 것임은 분명한 일이고 만든 음악을 세상 안에 내보내는 자유를 주고 싶음 바램 또한 그의 마음속에 있었을 것 같아. 네가 화간데 그림을 더 이상 발표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게 아니고, 네가 소설가인데 더 이상 소설을 발표하지 않겠다고 해서 소설을 쓰지 않는게 아니고, 네가 과학자인데 더 이상 연구발표를 하지 않겠다고 해서 연구를 하지 않는게 아닌 것처럼, 그래서 나타난 결과에 대해 침묵만을 지킬 수 있는 은자가 아닌 담에야 세상이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당연한 거잖아. 그 마음이 98가요계의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른 서태지 컴백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당연한 발로가 아닌가 싶어. 아마 나도 이런 것에 대해서 예전에 생각해 두지 않았다면 욕부터 했을거야. 유명하진 않지만 비슷했던 정태춘의 선언번의가 한때 나에게 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거든. 90년 ‘아!대한민국’음반의 불법적인 테잎발매와 그의 음악인생의 변화가 그의 팬이었던 나에게 준 의미는 그때나 지금이나 상당한 것이니까 말이야. 90년 이후의 집회현장이나 대학축제의 콘서트 현장에서 그의 말은 다시는 예전의 노래들을 부르지 않겠다는 선언이었고 그 때 그의 변화는 예전의 노래들을 사랑한 나에게 상당한 아쉬움이었지. 그당시 그의 말을 잠깐 인용해볼까해.
「문화는 정치적 산물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우리 문화에 있어서 ‘한’의 정서를 집요하게 강요, 주입시켰던 일제나 독재권력들의 의도는 민중의 힘을 나약하게 하려던 정치적 음모요, 현재의 식민지적 문화상황도 구미의 패권적 정치세력의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일진대 이러한 모순과 억압과 착취구조를 깨기 위해 이젠 ‘노래’가 그것들에 대한 공격을 구체적으로 해야 할 때입니다. 나는 이러한 지금 우리의 상황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고 그래서 내 노래는 또 우리들의 노래는 이제 우리민족의 ‘힘찬 정서’를 찾아내어 그것을 바탕으로 직설적인 노래, 일어서서 외치게 하는 노래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왜곡된 역사, 타락한 시대의 배설물로서의 노래가 아니라 역사와 시대에 옳게 복무하고 함께 나아가는 ‘이 시대의 노래’의 바른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강경한 어조로 다시는 사랑 타령을 읊조리지 않겠다던 그가 어느날 예전의 노래들로써 전국 순회 콘서트를 여는 모습을 보면서 일종의 배반같은 마음, 믿었던 사람에게서 버림받는 듯한 마음을 가졌던 나의 그때의 일기를 또한 공개해 볼까 해.

내가 알던,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이 오늘 밤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진다. 많은 것을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더 많은 것이 내 가슴속에 들어와 있고 결국 잊혀지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애틋함 뿐일러라.
김민기의 노래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한다. 얼마전 정태춘씨의 예전 노래들 공연이 있었다. 보러 갈까 했었지만 그에 대한 실망스러움으로 공연장을 찾을 수가 없었다. 투쟁의 노래는 싫지만 그리고, 그의 예전의 노래를 나 사랑했지만 그의 선택에, 그 확고한 신념에 나 박수를 보냈었고 그의 신념이 얼마전 불법음반 ‘아!대한민국’이 정규 음반으로 세상에 등장했을 때 나의 승리처럼 기뻐했었다. 그러나 그의 과거 선언 -다시는 이제 예전의 노래를 부르지 않으리라던 그의 말이 귓전을 더욱 때림은 십년을 넘기지 못하는 한 사람의 신념과 더불어 날 실망시키고 있다.
적어도 그는 공인이고 그의 노랫말들이 제도권 밖의 이상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꿈이 됐든 바램이 됐던간에 무언가를 제공하는 그가, 그의 언행불일치가 이 밤 세상의 낯설음과 함께 비수처럼 날 찔러온다.... 이하 생략.
970720 - 양호의 일기 중에서

일년전의 상념들이 유치하기 그지없지만 그렇게 그의 배배배.. 배신을 용납하지 못하던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날 부턴가 마음을 바꿔 먹기 시작했었어. 그때와 지금의 세상은 변했고 음악이 투쟁의 무기로 더 이상 쓰일 효용이 줄어드는 지금에 단지 예전에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이제는 음악을 접어두고 야인으로 돌아가는게 그가 할 일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거지. 물론 서태지의 이번 음반이 이런 개인적 고뇌에서 왔다고는 생각하기가 솔직히 힘들지. 분명히 그 이면과 또는 정면에는 상업주의가 버티고 있으니까 말이야. 어쨌거나 지금 정태춘은 새음반 ‘정동진, 건너가다’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고 다시 돌아온 서태지 또한 예전 같은 인기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음악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지녀본단다. 존 덴버가 정치적 성향의 음악으로 돌아서고 비행기 사고로 죽은 순간으로부터 음악가의 변모하는 마음에 대한 관대함이 열매를 맺었다면 어떨까?
이번 발매한 음반에 대해서도 조금 얘기해 볼까?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철저한 상업적 계산하에서 얼굴도 비치지 않는 가수의 음반이 선 주문만으로 백만장을 예약한 것은 분명 성공이고 올해 최고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할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약속된 두 번째 음반이 기록을 깨길 기대하는 것을 제외하면- 음악에 대해서 얘기하라고 하면 그의 차기작은 결코 성공을 거두기는 힘들 거라는 예상을 조심스럽게 타진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단지 한 장의 음반에서 두곡의 음악만을 들어본 상태지만, 그래서 이런 견해들이 빗나갈 수도 있지만, 그리고 빗나가기를 또한 기원하지만 그의 개인적 인기와 음악역량은 겉돈다는 것이 솔직한 견해야. 지금 서태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지를 음악에 있어서의 아티스트로 만들려는 이미지메이킹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그의 이번 음반의 타이틀 곡인 Take. two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그 비디오를 서태지의 의견대로 거친 이미지로 만들어낸 ‘전상일 시각공작단’ (이하 ‘전시공’)의 애니메이션은 기대와 못미치는 수준이고 그 수준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현주소를 진단하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아. 왜냐구? 적어도 서태지에 대한 이름값을 위해서 삼성이 얼마만한 투자를 했을지는 안봐도 뻔한 사실이니까. ‘전시공’의 전상일씨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 자신이 이번 음반으로 아티스트가 되고자 하는 노력을 대중적 인지도에서 벗어나는 파격으로 연출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어.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낸 ‘전시공’뮤직비디오의 침흘리는 야수를 보면서 이 이미지들이 셀드로잉으로 제작됐으면 어떨까 싶었었어.
세상에 대한 공격은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에 대한 항변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 싶었고 편견으로 이루어진 그리하여 부서진 세상안에서 포효하는 - 하지만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지나친 미성(美聲)?- 그의 미래를 그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어. 굉장히 기대를 했던 작품이었지만 어쩔 수 없지 뭐. 여긴 한국이고 서태지는 마이클잭슨이 아니니까 말이야. 두곡을 들어봤는데 음악은 얼터너티브(Alternative?대안(代案))의 감성을 베이스로 깔고 있고 그리고 악기의 사운드 뒤로 자신의 목소리를 상당부분 감추고 있어. 좀 조심스런 행보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서태지의 글에서 음악으로만 봐달라고 했고 가사는 어짜피 알아듣기 힘드니까 음악만을 중점으로 들어봤는데 자신의 이전 이미지에서 변모하기는 쉽지 않게 들렸어. 음악만을 놓고 볼 때 비록 얼터너티브를 표방하지만 진정 그의 음악이 그의 얼터너티브(대안)가 되어주지는 못할 듯 했어. 그건 솔로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딜레마거든. 어떤 솔로가수도 자신의 음량과 음색, 음역으로 밖에는 거의 평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야. 많은 음악평을 읽어봤지만 솔로가수들의 사운드의 미장센에 대해서는 그렇게 크게 언급되지 못하는게 주류고 서태지의 이번 음반에 거는 사람들의 기대또한 그의 보컬에 있지 배치되는 사운드에 중점으로 가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비록 서태지가 그렇게 들어주기를 희망하지만 그룹의 형태가 아니고서는 음악에 대한 평가를 얻기는 쉬운 일이 아니니까. 만약 서태지가 그룹을 결성해서 메인 보컬로 활동한다면 아니, 더 나아가서 자신의 그룹세션의 원래 자리인 베이스로 돌아간다면 난 정말 그를 90년대와 다가올 밀레니엄 안의 음악천재로 비평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번 음반에서 곡에 제목을 붙여주지 않은 것은 성공과 실패라는 절반의 양면을 지니고 있어. 성공이라면 기존의 음악적 관습으로부터의 차별화라는 성공을 거두었고 그 성공은 ‘넘버 3’의 시나리오가 어떤 식으로든 모방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그런 양식을 차용할 수 없다는 -그랬다가 무슨 비난의 소리를 들을려고- 그만의 전략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실패는 제목을 붙여두지 않음으로 인해서 그의 새 음악들이 어쩌면 컬트(숭배)가 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미완의 작품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은 ‘이념의 사생아’와도 같을 거라는 거야.
음악에 대한 집중평가는 음악평론가들이 제대로 짚어주겠지. 단지 전곡을 듣지 않고서 이런 얘기를 지껄이는게 좀 걸리긴 하지만 음악 외적인 요소들에 대한 생각들도 얘기하고 싶었거든.
남의 생각이란건 때론 우습기 마련이고 자신의 생각이 진실이다라고 여길 수도 충분히 있는거고. 그렇지만 우습건 괴상쩍건 같이 생각한다는 건 중요한 거니까. 서태지가 돌아오고 아이들이 선생님 경질의 탄원서를 제출하는 동안에도 오늘 하루는 이렇게 시작이 되고 생각들은 또 새로운 생각과의 소개팅이나 미팅을 끊임없이 요구하겠지.

Text : Minerva's Owl (98-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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