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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 Poem & Etc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3

빨간부엉이 2006. 3. 19. 22:18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3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Ⅲ, 또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 대하여

※ 이 글에서 고어로 쓰여진 '아래한글'은 웹에서 표현할 수 없어서 '아래아한글' 이라고 표기하였습니다.

‘지금’,‘여기’,‘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무엇을 위해서 숨을 쉬는 걸까?
너무 거창한가?
그렇다면 ‘내일’,‘다른 곳’,‘나 또는 너’는 무엇을 위해서 ‘지금’,‘여기’,‘우리’속에 있는 것인가? 세상이 존재하는 한 어떤 것에도 정답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결과만이 있을 뿐이 아닌지 비가 내리고 그러면서도 무더운 이 이중의 모순 같은 날씨 속에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정답은 없지만 정답에 가까운 것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각자가 내어 놓을 수 있는 오답(誤答)과 오답의 절충선이다. 그렇게 맞물릴 것처럼 다가서지만 결국은 언제나 평행선을 유지하는 몇 개 또는 몇 십개의 오답의 선위로 정답이라는 기차가 생각이란 에너지를 연료삼아 달리지만 그 기차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설령 기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오답의 선 하나를 세상에 깐 어떤 이라도 말이다.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Ⅲ부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러하지만 단지 또 하나의 오답이나마 생각해보고 싶은 마음으로부터 출발한다.
기차가 출발한다. 오늘의 중간역은 ‘아래아한글’이라는 역이다. 이 기차는 ‘소프트 웨어의 개발’이라는 따뜻한 역을 출발하여 ‘불법 복제’라는 어둡고 컴컴한 역을 지나치고 ‘IMF’라는 찬바람부는 역에서 잠시 쉬어서 ‘도산과 합병’이라는 냉동칸을 뒤에 달고 ‘방관과 참여’역을 경유해서 방금 ‘국민의 승리처럼 보이는 수많은 논쟁들의 파생’이라는 역을 떠나서 지금 ‘아래아한글’이라는 역으로 숨가쁘게 달려오고 있다.
처음의 관심사는 그거였다. 그나마 컴맹에 가까운 내가 조금이라도 익숙해진 이 문제의 프로그램 ‘아래아 한글’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이었다. 처음의 관심은 그렇게 개인의 이기심의 발로에서 시작하였지만 그것이 ‘아래아한글’살리기 운동본부의 발촉과 그 광고를 보고 참여해야겠다는 순수한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기사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관심사는 조금씩 확장이 되고 있었다. 그 기사는 운동본부의 대표가 속해 있는 모회사가 이미 구입해둔 ‘아래아한글97’프로그램을 팔아먹을려는 얍삽한 상술이라는 친구의 얘기였다. 그 말을 듣고서 그리고 지금 작은 마음들이 모여서 미약하나마 결실을 맺은 결과 앞에서 그 기사에 대한 진위의 여부보다는 나타난 결과만을 보고 싶은건 그게 상술이든 무엇이었든 동참하지 못한채 이루어진 결과의 부산물을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게 됐다는 자괴심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기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고 적어도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기차를 외면할 수는 없다는 현실인식 때문에라도 그 문제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제 단지 하나의 워드용 프로그램인 ‘아래아한글’과 MS사의 ‘마이크로 소프트 워드’와의 문제만이 아니라 거기에 국가적 위기의식의 발로가 승차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린 누구나 이 사건의 경위와 결과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 잘 아는 얘기를 왜 지금 하고 있는가의 문제제기는 바로 여기 우리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이 1446년 9월상제때 발표한 우리의 말 ‘훈민정음’이 그 시절 대부분의 사대주의자들에 의해서 핍박받고 소외시된채 몇백년을 흘러왔음은 주지할 만한 현상이 아닐 수가 없다. 한글과 컴퓨터사의 이찬진 사장이 이런 맥락에서 이미 1933년도 새롭게 제정된 국어 문법에서 영원히 사라진 아래아(?)의 음가를 살려 ‘한글’을 ‘아래아한글’이라고 표현한 것이나 그리고 계속된 프로그램상의 변화속에서 우리의 고어들을 표현할 수 있게끔 한 것은 열악한 우리말 사랑의 환경속에서 박수를 보낼 만한 일이었다. ‘훈민정음’이 ‘언문’이 되고 ‘언문’이 ‘국문’이 되고 ‘국문’이 ‘한글’이 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말은 언제나 찬밥신세 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거리를 메우고 있는 무국적의 간판들과 선남선녀들의 가슴과 허리에 쓰여있는 뜻도 제대로 모르는 영어단어들로 우리의 몸을 치장하고 돌아다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제는 망국병이라 불러도 좋을 무차별한 ‘영어사랑’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그리고 필요악같은 존재라고 그렇게 영어를 합리화 시킨다면 당연히 할 말은 없어지게 된다. 목구멍은 포도청이고 사흘 굶으면 담넘지 않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현실이라는 무서움이지만 지금 난 여기서 우리에게 그렇게 묻고 싶은건가 보다. 그 현실은 누가 만들었으며 지금 우리만 살아남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말이다. 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영어는 이미 세계공용의 언어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제 해방과 6.25로부터 시작된 ‘Welcome to English'의 대책없는 구호를 아버지 세대에서 우리가 이어받고 그리고 이제 우리의 자식세대에까지 이어서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의 아이들에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익히기 전에 먼저 유치원에서 영어를 익히고 그것도 모자라 영어학원으로 아이들을 내모는 무서운 짓을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행하고 있는게 아닌가 말이다. 비단 거기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2세대 또는 3세대에 걸친 우리들은 지금 여기를 외면한채 지금 다른 곳을 향해 한없이 해바라기 하고 있다. 이제는 뚜렷한 해약이 없는 ‘영어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험에고 영어가 빠지지 않는다. 대기업이든 공기업이든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두가지 영어와 순종이다. 그렇기에 요구하는 영어와 순종을 주지 못하는 일부층이 내걸 수 있는 슬로건은 이제 바로 그것 하나뿐이 아니겠는가 싶다.
이런 생각들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관념적이라는 걸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미 3대가 잘못된 교육체계 속에서 영어만이라도 영어만이라도를 부르짖고 있다. 지금은 잠시 주춤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녀들과 생이별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교육현실이 못마땅하다고 해서 자식들을 그렇게 해외로 보내도 되느냐고 묻는 질문에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렇게 대답을 한다. 만약 잘못되도 영어는 건질게 아니냐구. 언젠가 이런 부모들의 대답을 들으면서 너무 소름이 끼쳤던 적이 있다. 만약 잘못되도? 그 잘못됨의 선이 도대체 어디까지라고 생각하는 건지 정말로 그 부모들에게 묻고 싶어졌었다. 슬럼가의 그런 문화를 습득한채 돌아온 자식에게서 단지 엉터리 영어의 구사가 가능하다고 해서 “아이고! 귀여운 내자식, 영어 잘하네”라고 흐뭇한 웃음을 던질 것인가, 그리고 그 웃음뒤로 부모들이 스스로 선택한 ‘만약 잘못되도...’의 결과처럼 이미 몸에 익은 잘못됨을 위하여 부모의 목숨을 살해하는 불행을 사회전반에 이슈로 던져도 그게 영어만이라도 건진 정말로 장한 일인가 지금 여기서 되짚어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아직은 우리의 사회적 관습속의 종교적 의식이 불교적 관습속에 있고 -1세대와 2세대가 있는한- 기독교에 그렇게 장악되지 않은 우리 현실속에서 자식사랑을 위한 ‘육보시(肉普施)’를 그렇게 요란 뻑적지근하게 치뤄내야만 하는 걸까? 그 결과가 정말로 자식을 위한 사랑의 결과인가?
이미 교육의 수행체계는 답습이라는 이름으로 무너진지 오래이다. 아니, 처음부터 잘못된 시작의 첫걸음을 그렇게 시작한 것이다. 해방이 되고 6-3-3-4의 서구적 교육체계를 들여오면서 거기에 맞춰서 진행되는 현대화라는 과정들 속에서 득세의 세력들이 친일 속에서도 살아남고 들어선 이승만 정부에서 여전히 득세를 하고 4.19로 세워진 장면 정부가 박정희에 의해서 무너지고 또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서 다시 군사정권이 연장되고 그리고 또 그러는 속에서 여전히 기득권의 세는 항상 ‘햇빛 지향형’인물들 이었다. 식민지 시절에는 총독부에서, 해방이 되고 자유당에서, 민주당 정권에서도, 5.16이후 민주공화당에서도 여전히 그런 ‘친권력’적이고 ‘친미’적인 인물들의 득세가 몰고온 결과가 지금의 ‘한글’과 ‘아래아한글’의 상여가 나가는데 울려퍼지는 만가(輓歌)소리의 배경코러스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서두에 ‘방관과 참여’를 잠깐 언급했었다. 참여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건 바로 우리다. 이찬진 사장도 아마 놀래지 않았을까 싶었다. 기자회견하는 그의 씁쓸하면서도 허탈한 표정을 보면서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읽고 지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주 잠깐의 정계 진출이 그가 미치는 컴퓨터 시대의 영향력을 흡수하기 위해서 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점차로 방만해진 경영 형태도 불법복제라는 참여를 하는 우리들로부터 온 것임을 또한 생각해보고 넘어가야 겠다. 무엇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이제 새로운 형태의 참여를 이찬진 사장의 손을 떠난 ‘아래아한글’에 우리가 보내지 않으면 그건 여전히 과거식의 참여를 하는 것과 하등 차이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관의 주체는 누구인가? 정부인가? MS사가 워드 시장을 장악할 때의 손실이 얼마인가를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다. 단지 엄청나게 많다는 것뿐. 대부분의 이 사건에 대한 시선 속에서 눈앞의 외자유치라는 차원에서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정부의 조삼모사(朝三暮四)식 정책을 비난하는 그래서 이번 사건을 두고 내 마음대로 내린 결론 ‘원숭이정부’를 공격하는 발언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건 분명 사실이지만 정작 우린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전에 항상 무언가 기댈 것, 핑계댈 것, 공격할 것을 늘상 염두에 두는 좋지 않은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그 과녁의 중심점에 정부를 놓고 있다. 지금 소프트웨어 ‘아래아한글’의 명멸(明滅)과 부활이 시사하는 것은 불거져 나온 작은 현상앞에서 그 현상이 뭉치고 뭉쳐서 국가라는 하드웨어를 언젠가는 고장나게 만들고 말거라는 사실이다. 찬양과 찬미가 사람을 현실에 안주하게 만드는 악마의 댄스라면 질책과 질타는 사람을 현실에서 도망치게 만드는 악마의 시(詩)다. 지금 우린 정부라는 매머드이면서도 대중을 먹고 사는 때론 나약한(?)존재에게 10점 만점의 골드를 맞출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내부를 돌아다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론 정부에게 악마의 시와 댄스를 동시에 제공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방관을 통하여 지금의 사태를 몰고온 주범이자 공범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함 속에서 문화재가 도난 당하고 훼손 되고 그러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이 행정정책만의 잘못인가 하는 질문 또한 안할 수가 없는 것이다. 파괴와 파손의 책임이 또한 우리의 것이기도 하고 우리의 의식이 언제나 방관쪽에 더 기울어 있었음을 지금 여기서 스스로 고백성사하는 경건함을 지녀야 하는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몇 번의 보고서 속에서 난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을 언급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사고가 국민과 국가에 대한 기만이라는 그의 말이 언제나 과거의 역사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좋은 비유로 다가올 수도 있겠다 싶다. 그리고 그 말은 항상 과거지향적인 나에게도 언제나 결부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직도 우린 해방이후 권력지향형 인물들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옷을 입고 있다. 그렇다고 그 옷을 벗어버릴 수가 없는 것처럼 이미 지나간 결과에 왈가왈부하기 전에 다가올 내일을 위해 앞으로의 새로운 자리를 준비하는 자세를 지녀야 겠다. 그건 때론 방관일 수도 있고 때론 참여일 수도 있다. 다만 그 방관과 참여의 수행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개선해 나가야 하는게 아닐까 싶다. 매사를 가끔은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인지 몰라도 이런 중국 속담을 자주 인용하는데 ‘온 사람은 좋지 않고, 좋은 사람은 오지 않는다’라는 속담을 이 경우에도 대입시켜 보게 된다. 결과론적으로 온 사람(‘아래아한글’)은 좋지 않았고 좋은 사람이 오지 않는 것처럼 요즘 자국 내에서도 ‘윈도우 98’에 자사 제품을 끼워팔기 등의 경영으로 욕을 먹고 있는 MS사가 왔었다. 이찬진 대(對) 빌 게이츠라는 대립항이 아니라 MS사 대(對) 지금 여기 우리의 작은 싸움이 되어버렸었던 지난 얼마간의 ‘아래아한글’ 파동이 나에게 주는 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크다 한들 한 회사이고 그리고 아무리 작다 한들 한 나라인데 그 한 회사와의 담합이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드는 현실이 지금 여기 우리 앞에 닥친 결코 도망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현실이라는 사실 앞에서 어쩌면 자꾸만 무기력 해지려는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방관과 참여’의 이분법적 논리 앞에서 올바른 행보를 딛는 우리의 모습을 구상하여야 겠기에 지금 작은 싸움터에서 빠져나온 생각들을 수인(囚人)으로 만들어 활자라는 수의(囚衣)를 입혀 생각의 재판정 앞에 잠깐 세워보았다.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는 누구나의 마음에 있다. 어떤 판결이 깊은 땅속에서 잠을 자고 있을 세종대왕님의 숙면을 지켜줄 것인지... 땅땅땅.
기차는 여전히 가고 있다. 언젠가 글로벌(Global)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로컬(local)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신토불이로 대변되는 국수주의(國粹主義)라는 말을 한적이 있었던 것 같다. 글쎄, 이런 생각들이 정말로 지구촌화를 막는데 장애물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아직 전혀 해결되지 않은 현대사의 수많은 쟁점들을 놓고서 글로벌화 되어가는 세상에 발맞추어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게 과연 옳은 일인가고 말이다. 단적인 예로 앞에서 언급한 망국의 주체인 친일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계속된 득세에 대한 어떤 처리조차 못한채 지금 기차를 달리게 하고 있는데, 그리고 오늘 담론의 주체인 ‘한글’의 현재도 찬밥 신세인 작금의 현실이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의식속에 살아있는 위정자들의 만행인데 어찌 지역적 논점을 해결치 못한채 전지구적 이야기에 동참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건 계단을 차근차근 밟지 않고 뛰어 오르다 다치는 아이들의 장난과도 같은 결과 앞에서 망연자실 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일거라는 걱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걱정들을 안고서 기차는 오늘도 내일도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들 앞에 기적을 울리며 달리고 있다.

Text : Minerva's Owl (98-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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