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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 Poem & Etc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1

빨간부엉이 2006. 3. 19. 22:14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1




마루에 대자리를 깔고 배를 깔고 누워서 오후의 망중한 속에서 ‘고질라’에 대한 시선에 대해서 할 말이 좀 있을 것 같아서 노트에 몇 자 끄적이다 그저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목적이 없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새삼 스러울 것도 없는 마음에 또 다시 지배를 당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지니까 불쑥 화가 치민다. 그 화라는 것의 주체는 나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일견 잘못된 의식과 방향에 대해서 인가 보다. 하지만 어쨌든 목적을 찾기 쉽지가 않은건 사실이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콤플렉스에 대한 망령이 살아난 걸까?
학원가의 그 자체적 무게만으로도 공포의 메타포가 되기에 충분한, 어쩌면 학원괴담(怪談)이 아니라 교육관습에 대한 괴담처럼 보여지는 ‘여고괴담’이 꾸준한 흥행에도 불구하고 황금의 시간대인 주말 극장을 ‘고질라’에게 내어주는 여전히 반복되는 흥행위주의 촌극으로부터 그 문제의 새로운 발단은 시작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고질라’와 ‘여고괴담’의 자리바꿈이 아니라 ‘직배영화’대 ‘한국영화’의 싸움처럼 보여지는데 문제는 이것을 IMF라는 시대상황에 싸잡아 묶어서 처리해 버리려는 약소국가의 스스로 의식있는 ‘환경미화원’임을 자처하는 일부의 의식으로부터 영화와 현실이라는 싸움으로 변질시키려는 보이지 않는 의도에 있다 하겠다.
연초에 ‘타이타닉’에 대한 금 모으기 운동과 결부시킨 영화보기에 대한 탄압은 ‘타이타닉’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결코 아니다. 최초의 UIP직배영화인 마이클 더글라스 주연의 ‘위험한 정사’가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 것이고 ‘위험한 정사’가 들어선 것 부터가 우리의 영화보기에 있어서의 위험함이 된 것 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삭발과 단식 농성으로부터 극장에 뱀 풀어놓기까지의 일련의 사태들은 직배를 막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대안이 될 수는 결코 없는 것이었다. 그 증거는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흐른 뒤 지금 극장의 관객동원수가 여실히 말해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는 관객을 욕할 것인가? 천부당 만부당 한 말씀이다. 영화는 분명 인간이 만들어낸 종합 예술이고 꿈의 공장임이 분명하다. 그 공장의 산물을 오염시킨 건 거기에 이데올로기를 집어넣고 그 이념의 추종자를 끊임없이 찾아내려 했던 ‘환경미화원’들에게 있는 것이다. 직배를 막았거나 막지 못했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꿈을 찾는 순간의 가슴 떨림을 위해 극장을 찾는 이들의 발길을 오천원짜리 매국노 취급하는 일부의 의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재미없는 영화를 만들고 국산품이니까 애용해 달라는, 우리 경제를 누가 살릴거냐는 국민감정에 호소하는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충무로의 이태원 사장의 배급체제가 얼마전에 무너진 것은 우리 영화나 영화 보기의 최일선에 있는 관객이거나 좋은 시발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금 배급에 대한 우리 영화의 국제적 약체 일로는 국내 시장의 오래된 관습과 관행에 얽매인 구태의연함에 있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좋은 영화의 배급망이 한 개인의 입김으로부터 좌지우지 되는 현실에서 무슨 국제적 위상을 찾고 국제적 영화제에 초청되어 마켓을 구성할 수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이태원 사장의 배급체제가 무너지면서 우려를 나타낸 많은 영화 관계자들의 시선이 이제 점차로 기우였슴이 드러나고 있다. 그 작은 출발은 그 난국으로부터 시작된 자체적 각성이었고 올해 칸느 영화제에서의 조은령 감독의 단편 ‘스케이트’가 단편본선에 진출한 것은 배우가 아닌 작품으로 국제적 영향권 안에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후의 첫 번째 쾌거가 아닌가 싶다. 이런 시작이 구태의연하고 답습적인 체제의 개선으로부터 온 결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얘기가 좀 샜는데 ‘고질라’로 돌아와보면 잘 만들어져서 잘 나가지는 결코 않은 ‘여고괴담’의 흥행을 햇볕 아래로 몰아낸 것은 씨네하우스의 X같은 일임에는 분명하다. 인기가 있음에도 한참 잘나가던 영화를 쫒아낸 것은 고질라에 쫒겨서 주거지에서 피난해야 하는 영화속 시민들처럼 우리 영화를 장마속 우산도 없이 - ‘고질라’를 보면 두시간 넘게 비만 주륵주륵 내린다- 거리로 내어모는 일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싸움에 관객을 의식이라는 이름으로 끼워 넣는 건 분명 파행이다. 관객은 일단 배제해두고 작품 대 작품으로 승부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 영화의 가장 밀도있는 현주소를 나보고 얘기 하라면 모든 것이 너무 늦게 시작됐다는 것이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하지만 지금 상황에는 결코 맞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또한 틀린 말도 아니다. 내 얘기는 단기적인 차원에서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나올 것이 분명히 있기야 있을 테지만 영화 백년을 넘긴지 오래된 지금에 와서는 어떤 작품도 답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주소이고 보면 우리 영화의 지금 행보가 답습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돈이 없기 때문에 SF는 유치하며 한국적인 것을 유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럽과 러시아 쪽의 예술영화의 분위기와 양식을 베끼기에 급급함이 솔직한 시선에서의 한국영화의 작태(?)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특별한 새로움이 없다는 전제하에 창작은 모방으로부터 라는 말로 이 행태를 대변해야만 하겠다. 난 어쩔 수 없는 한국시민이니까.
모든 것이 아직은 살아있는한 영원한 결론은 없지만 이 두 장짜리 얘기에 대한 결론은 필요할 듯 싶다. 너무 여기저기 기웃거렸으니까 말이다. 올 초부터 이런 얘기는 내 마음에서 있었던 얘기기도 하다. 단지 지금 ‘고질라’와 ‘여고괴담’이 그 담론의 현장에서 머리끄뎅이 잡고 싸우기 때문에 안해도 그만인 얘기를 시작한 것 뿐이다. 싸움의 결과에서의 승자는 먼 훗날 까지는 지금의 싸움 도마뱀인 ‘고질라’로 대변되는 직배에 있을 것이다. 이건 분명 암담한 현실이고 8,9십년대를 관통해온 우리 세대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가 웃으며 한때의 괴담으로 치부해 버리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기도 하지만 그 결과를 자식과도 같은 작품의 질적 저하에 두지 않고 무지몽매라는 비하의 언어로 관객을 매도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각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관객은 보고 싶은 영화를 볼 권리가 있다. 사라졌는지 더 강화됐는지 알 수 없는 공윤의 가위질 앞에서 이런 자승자박의 싸움은 우리 영화의 활성화를 퇴보시키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진정 싸워야 하는 주체는 하나의 작품인 영화를 통념적이고 시국적인 견지에서 멋대로 처리해 버리는 공권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현상을 보고서 직배의 주체와 흥행만이 모든 것인 주체는 손을 맞잡고 득의의 웃음을 짓고 있을지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말이다. ‘고질라’가 우리의 여학교를 짓밟았으니 보지 말라고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건 싸워야 하는 주체에게 또 한번의 승리를 안겨주는 결과 밖에는 낳지 못할 것이다. 얼마전에 전화온 친구에게 심심하면 ‘고질라’나 보라고 얘기 했더니 약소민족의 의식이 어떻고 하는 얘기를 했었다. 이건 분명 신 제국주의에 대한 소극적 국수주의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말이다. 괴물이 등장하고 어떤 식으로든 그 괴물을 퇴치하여 시민을 보호하는 내용이 문화에 의한 신 제국주의라고 생각한다면 썸머시즌을 겨냥하여 흥행을 위해 만들어진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에 대한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지는 진정 약소국의 국수주의일 뿐일 것이다. 좀더 비약하자면 과거 일본의 인기물이었던 ‘고질라’의 미국식 영화화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아질 것이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들다. 영화뿐만이 아니라 그저 사는 것에 있어서도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여름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고 직배 대 신토불이의 싸움도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 이 열기속에서 안해도 그만인 싸움에 열을 올려 누군가에게 어부지리를 선사하기 보다는 제대로된 하나의 씨앗이라도 뿌려 다가올 가을에 좋은 열매를 가득히 맺게 하는 나무 한 그루를 키우는 일이 시급한 일이 아닌지 98년도의 화두 ‘영화보기에 대한 의식의 탄압’에 대한 소고(小考)의 한 변으로 마무리 할까 한다.
지금 발빠른 행보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중의 하나인 감상을 위해 극장 문을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

영화 보면서 내내 롤랜드 에머레이가 누군지 이름이 굉장히 낯익은데 하는 생각을 했었어. 영화를 다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아! ‘인디펜던스 데이’의 감독이었지’하고 생각이 났단다. 사실 나도 별로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친구가 보고 싶다고 해서 보았고 그냥 오랜만에 별 생각없이 봐도 그만인 영화를 한 편 봤구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어. 위의 이야기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그냥 영화 ‘고질라’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인디펜던스 데이’가 대통령 프로파간다 영화였던 것과는 달리 별로 큰 뒷배경을 감추고 있지는 않다는 거였어.
오프닝 시퀀스에서 대부분의 영화들이 시놉시스를 사람들에게 유추토록 하는 것처럼 핵폭발의 장면과 파충류들의 교차편집은 이 영화가 인간의 과학에 대한 돌연변이의 이야기임을 말해주고 있어. 그러나 이 영화가 ‘닌자 거북이’일 수 없는 이유는 다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 아닌지 싶더라. 일본의 시리즈물이었던 ‘고질라’가 미국으로 넘어오기 위해서 고질라에 의한 첫 재난의 피해자로 일본 어선을 상정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됐었고, 프랑스 영화 특수효과 팀의 참여로 인한 배려로 보이는 영화의 극적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프랑스 특수작전 팀인 것도 이 영화가 시궁창에서 뛰노는 오염된 거북이들의 이야기일 수 없는 이유처럼 보였다면 이상할까? - 근데 동원 아이큐 참치가 왜 나오지?
영화 ‘고질라’는 분명 관객으로 하여금 두시간 이십분 가량의 런닝타임을 지루해 하지 않게 하는 긴박감을 주긴 하지만 내러티브가 너무 약하다는 결정적인 흠을 지니고 있긴 하더라. 사이즈의 문제라고 못박은 전략대로 조감(鳥瞰)쇼트가 아니고선 한 화면에 고질라의 전신을 담지 못하는 것도 너무 비대해진 괴물의 크기에 대한 강박관념처럼 보여지는 것도 문제인 듯 하고 말이야. 영화 ‘고질라’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한 것은 말이야.

새로운 경향 - 스타 시스템의 배제
‘타이타닉’의 흥행으로부터 온 듯한 전략인데 헐리우드의 신경향인 듯해. 메이저급의 배우를 기용하는 대신 배우에게 나갈 개런티를 마이너급의 배우를 기용함으로 인해서 줄이고 차액을 영화의 특수효과에 쏟아붇는 거지. 장기적 안목으로 봐서 참 바람직한 일처럼 여겨져. ‘고질라’에서도 액션영화에 부합하는 메이저급의 배우는 한 명도 나오지 않으니까 말이야. 프랑스의 보험회사 직원(?) 장 르노를 제외한다면 -물론 그도 돈이 많이 지출되는 배우는 아니니까 말이야- 관객에게 크게 어필할 만한 배우는 등장하지 않아. ‘타이타닉’이 로맨스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타이타닉호에 대한 영화인 것처럼 ‘고질라’는 고질라에 대한 영화이지 등장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말이야. 그래서 특별한 내러티브상의 장점없이도 영화가 지루하지 않을 수 있는 요소이고.

답습의 경향 - 결말 처리
속편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영화의 끝처리는 항상 다음 이야기의 시작을 위한 포석으로 마무리되지. ‘고질라’도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이제는 다 퇴치되었다고 생각한 고질라가 알에서 부화하며 포효하는 장면으로 마루리돼. 비록 속편을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좀 참신한 결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속편의 숙제 - 불
초반부의 특수효과는 입이 딱 벌어지게 할 만큼 놀랄만한 것이지만 사람을 놀라게 할 만큼의 장면은 몇 차례되지가 않아. 그 중에서도 미진하게 처리된 것은 고질라가 불을 뿜는 두 차례의 장면인데 영화속 어디에도 고질라가 불을 뿜을 수 있다는 얘기는 언급이 안되있거든. 그런대도 고질라는 정면을 응시하며 불을 뿜는데 이게 상당히 미진한 처리인 듯 해. 아마 돈을 좀 더 썼다면 고질라의 측면에서 좀 더 밀도있는 카메라 워크로 불 뿜는 장면을 보여줬겠다 싶어. 그저 화면을 가려버리는 불 뿜는 장면에서 내가 생각한 것은 속편이 나온다면 특수효과에 있어서 가장 시급하며 중요한 처리사항이 아닌가 싶었어. 이것도 어쩌면 정말 맞을지도 몰라. 내가 작년에 ‘나쁜영화’ 평 쓰면서 장선우 감독의 차기작이 어쩌면 ALL애니메이션이 될 지도 모른다고 그랬는데 올 해 어느 잡지에 보낸 장선우 감독의 글에서 차기작은 100% 애니메이션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랬거든. ‘고질라 2’가 나온다면 내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지.

답습의 경향 2 - 영화사 빅사이즈 괴물의 짜집기
1933년 ‘킹콩’이 등장했을 때의 영화적 시뮬라크라에 대한 충격이 어떠 했을까는 더 말해 뭣하겠는가. 근데 ‘고질라’에서 신경을 거스르는 장면 하나는 도시전체를 트랙아웃으로 보여주면서 쓸데없이 고질라가 빌딩에 매달려서 울부짖는 장면이 들어가 있는데 당시 고질라는 지하로 숨어 들어 있었는데 전혀 연결되지 않는 이 장면은 ‘킹콩’에 대한 오마쥬였을까? 또 빼놓을 수 없는 ‘쥬라기 공원’과 ‘잃어버린 세계’에서의 공룡들의 장면들도 언뜻 언뜻 ‘고질라’에서 나타나는대 이건 거슬리는 시선이기 보다는 ‘쥬라기 공원’의 영향이 그만큼 지대했음을 말해주는 것처럼 보였어. 제일 짜증났던 장면은 지하에서 부활한 고질라 새끼들이 난장판을 만들면서 노는 장면을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시점으로 보여주는데 이 장면을 문명이 미개하며 흉폭한 세력을 제거해야 하는 시점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고 단지 그 장면이 완전히 ‘그램린’에서 흉폭해진 그램린들의 난장판과 너무 흡사했던 것이 짜증이 났다고 할까.

새로운 경향 - 무성생식
비록 ‘에이리언 4’에서 한 차례 써먹었지만 괴물들의 무성생식에 대한 새로움은 날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어. ‘킹콩 2’에서 힘들게 새끼 킹콩이 나오기 까지의 과정을 무성생식으로 일순간에 생략해 버릴 수 있는 설정은 앞으로도 괴물이 등장하는 영화안에서 생식의 과정에 시간을 뺏기기 보다는 그 시간 만큼의 스펙타클을 관객에게 제공할 수 있을테니까 또다시 써먹힐 수 있는 방법론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더라. 비약을 좀 하자면 서구의 어떤 예술 형태이든지 가장 빈번하게 써먹히는 것으로 종교 -기독교- 적 이야기와 관습에 대한 것을 소재로 즐겨 사용하는데 성모마리아 도마뱀이라는 영화속 권력욕에 사로잡힌 시장의 비꼬는 말투는 핵실험으로 야기될 수 있는 어떤 결과든지 서구의식의 근간이 되는 기독교적 사상마저도 위협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봤는데 이건 좀 비약이 심하지? 만약 이런 쪽으로 영화를 내가 계속 봤다면 이건 괴물이 등장하여 부수고 죽이는 영화가 아니라 인간의 그릇된 이기심이 만들어낸 괴물에 의한 종의 변질과 환경파괴라는 환경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사실 겨울에 대구에서 ‘에이리언 4’보면서 이런 생각 잠깐 하긴 했었거든. 좀 우습지? 그냥 내 생각이니까. 간단하게 그냥 얘기할려고 했던 게 너무 길어졌구나. 지루하지? ^^

Text : Minerva's Owl (98-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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