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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 Poem & Etc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1-1

빨간부엉이 2006. 3. 19. 22:17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1-1




싸움터에서 생각하기 Ⅰ-1, 또는 Ⅰ + Ⅱ = ?

때론 하지 않아도 그만인 싸움을 할 수도 있는 나이가 있다면 그 나이가 언제쯤 일까?
그런 질문으로부터 3부작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열어본다.
비가 여름에 어울리지 않게 소담스럽게 흩뿌리고 있고 공간을 채우는 물기의 시원함으로 인하여 더위에 지친 마음에 여유를 느껴본다. 삶에 있어서의 비란 늘상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에게 활력소를 주기도 하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기도 한다.
영화란 어떤 존재일까? 돌려 말하지 않아도 시공간을 채우지 못하는 꿈에 대해 그 가능성을 내면에서 실현케 하기도 하고 현실의 들뜬 마음을 그 차가운 현상의 밑바닥으로 끌고 들어가 지금의 존재를 돌이켜 보고 그리고 가질 수 없는 것을 동경하는 그릇된 마음을 일순 잠재우기도 한다. 여름, 그 지리한 무기력 속에서 사람들은 그 정체를 탈피하기 위해 애쓰기 마련이고 그래서 복날은 동물들의 순환의 수난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하나 여름을 가득 채우는 것은 누구나 하나쯤은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몽상(夢想)과도 같은 ‘귀신 이야기’이다. 영화 안에서 장르에 대한 변주곡을 가장 적게 연주하면서도 그리고 끝없이 반복되는 귀신들의 유혈입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스크린 앞으로 여름마다 끌어올 수 있는 ‘호러 무비’가 지니는 원동력은 가상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내재된 공포와 현실안에서의 무기력, 현실 안에서의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려보내기 위해서 같은 이야기의 계속된 우려먹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이 되면 ‘호러’영화에 그렇게 심취하나보다. 이제 우리의 관객들조차도 단순히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 화(化)’되어버린 하나의 영화앞에서 또한 그런 유행의 재창조를 위해서 노력하기를 멈추지 않을 듯이 보인다. 모든 영화의 모티브를 꼴라쥬하여 만들어낸 영화 〈록키호러 픽쳐쇼〉의 이십 몇 년이 지난 후의 개봉에 대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올 해 우리 앞에 공식적으로 다가 선 몇 편의 영화들은 〈스크림〉으로 ‘슬래스 무비’의 부활을 화려하게 성공시킨 웨스 크레이븐의 졸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든가 호러영화의 새로운 장르 -새로울 것도 전혀 없지만-를 개척한 피터 잭슨의〈데드 얼라이브〉의 후계자인 뉴질랜드의 신예 스코트 레이놀즈감독의〈어글리〉가 있기도 하다. 단지 스코트 레이놀즈가 뉴질랜드의 새로운 기수라서 피터 잭슨을 언급했지만 너무나도 다른 방식의 볼거리를 선사하는 두 감독의 새로운 발걸음을 기대해 봄직도 하다. 기본적으로 스플래터 무비를 표방하는 하드고어 호러의 완벽한 드라마투르기를 연출하는 피터 잭슨의〈데드 얼라이브〉가 전면에 코믹성을 강조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두 눈 뜨고 그 영화를 90분 동안 쳐다볼 수 있는 강심장을 지닌 사람이 몇 안될 것처럼 그리고 그 몇 안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라면 어떨까요? 라고 급작스런 코믹 스플래터 하드 고어에 대한 대안(代案)의 설문지를 던지는〈어글리〉는 어짜피 내러티브에 의존하지도 않고 플롯에 짜맞추어지는 정형을 갖출 필요도 없었다. 단지〈데드 얼라이브〉에서 코믹성이라는 양념을 빼버린 검은색 케찹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내어 놓기만 하면 됐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비록 흥행에서는 검은색 케찹이 아니라 시궁창 검은물이 되어버렸지만 부천 환타스틱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그 영화라는 사실이 흥행의 전면에서 찬물을 뒤집어 쓴 결과 밖에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가 되기도 했었다. 호러영화에 있어서의 코믹성의 완성자를 피터 잭슨이라고 본다면 그 코믹성에〈어글리〉의 진지함과 내셔널리즘이라는 국가적 알레고리를 담고 있는 필름마저도 표백된 듯한 라스 폰 트리에의 〈킹덤〉은 코믹성의 완성에 대한 진정 새로운 변주를 울릴 수 있는 또하나의 갈라지는 계보의 맨 윗자리에 이름을 적어놓을 수 있는 지금 무차별한 베끼기의 유일한 대안이기도 하다. 이제 5일 후면 공식적으로 우리의 극장에서〈킹덤 2〉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8월 베니스 영화제에서 시리즈의 마지막인〈킹덤 3〉가 상영되고 나면 우리에게도 내년 여름이면 이 기괴한 세기말의 레퀴엠을 들을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질 것이다. 그 행운은 극장을 꾸준히 채워준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킹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킹덤〉에 대한 이야기는 시리즈의 완결을 보고나서 새로운 제목으로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단지〈데드 얼라이브〉나〈킹덤〉이나〈어글리〉를 이야기 3부의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호러 영화의 앞으로를 끌고 갈 이대 조류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기 위해서 였다. 라스 폰 트리에는 더 이상의 괴담극을 만들어낼 사람은 아니다. 그 스스로 ‘왼손의 작업’이라 칭했던〈킹덤〉의 이야기는 그의 필모그래피안에서 왼손의 작업 단 한편(들)으로 끝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터 잭슨의 코믹호러극은 계속될 것이다. 오히려 가세된 영향력으로 인해 더욱 더 재미있게. 또 한켠에서는 더욱 더 진지해지고 그 진지함속에 여러 가지 당면된 문제들을 함축시키고자 하는 노력들이 진행될 것이다. 그 이대조류의 양면적 시발점이 바로〈킹덤〉이기 때문에 감히 새로운 영화만들기의 대안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란 개인적 시각에서 ‘사골을 끓인 곰국’이라고 생각한다. 최초의 영화들이 사골을 넣고 끓인 진국이라면 그 후일담을 논하는 ‘네오리얼리즘’이나 ‘누벨바그’ 또는 ‘뉴웨이브’는 아직은 맛있는 곰국에 비유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사골의 맛보다는 곁들인 후추와 파등의 양념으로 맛을 내는 지금의 영화가 있다. 그리고 앞으로의 영화의 승부수는 어디서 새롭고 맛있는 사골을 구해서 사골의 맛이 사라진 곰국에 맛을 추가하느냐의 승부가 될 것이다. 우리의 영화들은 지금 이 ‘사골을 끓인 곰국’을 제대로 만들어서 입맛을 잃은 사람들의 입안에 떠주고 있는가는 두고보며 생각해 볼 일이다. ‘코믹 잔혹극’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대중문화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상정되어버린 -된 이 아니라 되어버린- 송강호를 출연시켜 국내 영화시장의 새로운 돌파구의 첫발을 내민〈조용한 가족〉이 영화속 무대처럼 산장속에 유폐되어버린 것과는 달리 어언 두달의 롱런 상영을 하고 있는 〈여고괴담(女高怪談)〉의 이야기들은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일련의 여고생들로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한국영화에서 드물게 보는 컬트현상으로 까지 발전하고 있다.〈조용한 가족〉과〈여고괴담〉은 그만의 장르안에서 나아갈 두 개의 노선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나마의 성공보다는 드라마투르기나 미장센의 탁월함과 진부하지만 적어도 우리 현실에서는 쓸만한 몽타쥬의 적절성을 통해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여지는 -성공의 요소는 오히려 학교안에서의 교사에 대한 대리적 복수(?)- 영화〈여고괴담〉에 대해서 그 논란의 중점에서 잠시 비켜서서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영화〈여고괴담〉은 일단 사운드의 미장센에서 일련의 한국영화들이 고질적으로 답습하고 있던 내러티브를 흐리게 만드는 그래서 몽환적 효과로 사람들을 안개속에 가둬버려 그 모호함으로 감동을 유추케 하는 음악의 사용은 일단 배재하고 있는 듯 보여진다. 공포영화계의 오우삼이라 불리워지는 이탈리아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의 77년작〈써스페리아〉에서 아트락 그룹인 ‘고블린’의 그 소름끼치는 사운드의 성공으로 인하여 단지 소리만으로도 인간들의 공포의 본성을 끌어낼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듯이〈여고괴담〉안에서의 사운드의 배치는 일단은 합격점을 주어도 무방할 듯 싶다. 물론〈써스페리아〉가 떠오른 것은 같은 학교 -여고와 무용학교-라는 닫혀진 공간의 유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운드의 장면전이효과가 주는 것이 유사했기에 역시 영향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가 없는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운드와 함께 최초의 죽음인 늙은여우 박기숙선생의 죽음은 영화가 있게 만드는 죽음인 진주이자 재이의 죽음의 후속타이기에 최초의 죽음이라고 말하기에는 문제가 있지만 이 영화의 전체적 성격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박기숙선생의 안경알 한쪽에 비춰지는 재이의 상반신은 고답적인 면이 없잖아 있지만 한국영화의 CG와 편집능력의 진일보한 발전상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기술적인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다시금 영화가 주는 논란의 중점으로 들어가 보자.
대개의 공포영화들이 포식자의 시선으로 대상들을 쫒아가는 시점에서 영화가 서술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가 못하다. 아니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단지 이 영화가 여름시즌을 겨냥한 공포납량물에 그치기에는 그 안에 복선으로 깔고 있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 복선의 해결을 위해서거나 아니면 문제제기를 위해서라도〈여고괴담〉안에서는 어떤 주인공도 찾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카메라의 시점이 포식자의 시선과 일치할 수가 없는 이유이고 그렇지 않은 이유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처음에는 영화안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여겼지만 그것은 잘못된 시각이었다. 그것은 관객을 위한 관객에 의한 시점으로 시작되고 발전된다고 나중에는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여고괴담〉이 크든 작든 성공을 거둘수 있었던 요인은 어느 여학교에나 살아있는 귀신이야기의 차용과 결코 NO라고 말할 수 없는 아이들의 폭력에 대한 침묵과 그것의 가시화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어졌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그렇게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서 심각해 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귀신이야기가 그 존재의 여부를 놓고 토론을 벌이면 종교적 관점으로 발전하고 마는 맹점을 지녔기 때문에 박기형 감독은 98년도의 영화안에 98년도의 졸업앨범을 만들어 놓고 시간적 비현실성을 통해 이것이 결국은 허구에서 차용한 이미저리임을 얘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고이기에 그나마의 체벌장면으로 끝났지 이것이 남고의 -남고괴담(?)-이야기 였다면 그 강도는 더욱 심해졌을 것이고 교육계의 반발이 더욱 심화됐을 것은 자명하며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일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세대가 변하고 이제 초등학교 학생마저도 스스로 -과연 스스로인가는 정말 의문스럽지만- 자신에게 가해지는 언어적 물리적 폭력에 대해서 항거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 시대가 도래한 마당에 이런 이야기들은 너무나도 진부한 이야기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변해가는 세상에 발맞춰 그동안 감히 얘기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속속들이 드러나는 시대에 단지 교사의 권위만을 위해서 그 체벌을 정당화하는 시선이 못마땅한 것은 우리도 그런 시간을 공유했었고 지금 문제시 되고 있는 교사들도 역시 더욱 힘들게 공유했었다는 사실이다. 잘못이 있다면 그걸 관습이고 관행이라는 이유만으로 묵인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사람들의 의식이 점차로 평준화 되면서 이런 잘못들이 서서히 불거져 나오고 시정되고 문제시되는 지금에 와서 교사의 체벌의 윤리적 문제가 이제서야 고개를 드는 것은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는 건지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미친개’라는 닉네임으로 불리우는 남자교사의 돈 많고 1등을 고수하는 소영에 대한 편애와 소영에 대한 성적유희의 노리개감을 만드는 귓볼을 만지는 장난은 나중 진주(재이)에 의한 응징으로 귀가 잘리는 쇼트를 설정하지만 여고생들의 가슴을 쿡쿡 찌르는 행위나 공부 못하는 것들은 집에 가서 살림이나 하라는 식의 발언등은 영화에 대해 아이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지나친 상업주의라는 비난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칫 라깡이론을 내세운 페미니즘 논쟁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이런 요소들의 배치를 통해 박기형 감독은 단편인 전작〈과대망상〉처럼 좀 과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좀 염려가 되기도 했다.〈여고괴담〉의 성격을 분명하게 표면에 내세우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며 -해결은 어쩌면 과대망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정면으로 하지 못하는 말들을 은유적 미장센으로 감추고자 했지만 의도는 의외로 명백히 드러나고 그래서 이 영화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3자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은 이런 감독의 의중을 읽게 해주는데 억압된 고등학교 체제의 3자에 대한 숙명을 3학년 3반 교실의 설정을 통해서 조금씩 비춰주고 있다. 이미연이 선생님으로 등장하는 은영이라는 인물의 설정은 이 영화의 전체적 시간대를 아우르는 인물로서 뿐만이 아니라 과거 89년작〈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에서의 자살하는 여학생에서 선생님으로의 이입을 통해서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의 현주소를 묻는 질의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생각하는 영화속 시간대 10년간의 세가지 사건은 전교조 문제와 교사의 촌지논쟁 그리고 최근의 선생님 경질요구가 아닌가 싶다.〈여고괴담〉안에서의 3자에 대한 집착은 이런 세가지 사건에 대한 감독 스스로의 교육계에 던지는 질문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것은 은영이 학생에서 선생님으로 돌아오면서 치뤄야 하는 세가지 통과제의와도 맞물리는 것이다. 그것은 세명의 죽음으로 보여지는데 늙은여우와 미친개 그리고 만년 이등의 설움을 안고사는 무수한 이등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정숙의 자살이다. 물론 이 세명의 죽음은 각기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지만 돌아온 학교에서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의 우정에 대한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는 은영에게 제시되는 삼지선다의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변명을 통한 책임마저도 무의미하게 만드는, 우정에 대한 방관자적 입자에서 온 진주의 죽음에 대한 질책의 문제도 포함된 사지선다의 모의고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래자삼배(後來者三拜)의 도덕적 가치마저도 포함된 오지선다의 수능시험으로 변주되는 것이다. 그 모든 죽음들은 마치 십년의 시간동안 무수하게 바뀌는 교육제도에 대한 비웃음처럼 보여지는 것은 과연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그렇게 제시되는 모티브들에 대해서 영화속의 주인공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포식자도 없고 피포식자도 없는 기이한 한편의 괴담극이 벌어지는 것이고 그러기에 이 모든 시퀀스들이 관객의 시선에 의해서만 이해되고 입증될 수 있는 진정한 이유인 것이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할 것은 많지만 영화를 해부하자는 것은 아니니까 이제 배우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 볼까 한다. 내가 기억하기로 첫 영화 데뷔작으로 이 영화를 치뤄내는 내 기억속의 연기파 배우들이 꽤 많다. 지오역의 ‘김규리’가 그렇고- 연기파라는 말은 잠시 보류- 진주(재이)역의 최세연이 그렇다. 마치〈킹덤〉에서 다운 증후군 접시닦이들처럼 영화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두 명의 소녀는 김민정과 박소정인데 -둘 중 한명은 연기는 별로지만- TV브라운관을 통해 너무나 익숙해진 인물들이다. 청소년 드라마〈어른들은 몰라요〉와〈사춘기〉를 통해서 동시대의 감수성을 잘 표현하던 배우들을 기용함으로 인해서 자칫 이쁜 얼굴 둘로 포장되어 버릴 뻔했던 영화를 감정이 있고 감동이 있는 영화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 영화에서 최세연이라는 배우가 빠지고 다른 하이틴 스타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 영화는 아마도 관객동원에는 성공할 지언정 평론에서는 최하 등급을 받는 영화가 됐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용을 전혀 모르고 보는 사람들은 귀신이 누구야? 하는 의문을 시종일관 던지고 있었을 것이다. 추리소설적 기법을 끌어들여 별다른 쇼킹한 장면의 배치가 없이도 영화가 끝날때가지 관객의 시선을 모을 수 있는 돈안들이는 방식이기도 한데 이런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방법중의 하나는 추리소설을 많이 읽는 것 뿐이다. 진주(재이)가 귀신임을 알게 해주는 복선은 단지 하나의 그림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오는데 지오가 죽은 늙은여우의 얼굴을 그린 그림에 대한 재이의 설명을 들어보면 쉽게 알 수가 있다. 물론 교과서적인 설명이지만 그림에 있어서의 빛과 명암에 대한 중요성을 지오에게 설명하는 장면은 전혀 그림을 배운적이 없는 듯한 재이의 설명치고는 너무나 훌륭하고 그 설명을 들은 지오가 중학교때 그림을 배운 적이 있느냐고 묻고 그리고 재이는 아주 오래전에 그림을 배운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적어도 그림에 대해서 그정도의 평을 할 수준이라면 아주 어려서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 배운 그림그리기에 대해서 그렇게 설명을 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이가 이 학교에 그렇게 오래 다니는 그리고 미술부에 있었던 그리고 그림과 은영이 선물한 두상 석고조각속에서 죽은 진주이자 재이임을 관객에게 슬며시 흘리는 것이다. 물론 그걸 깨닫고 보면 재미가 반감 될 수도 있지만 추리적 기법에 대한 가장 재미있는 요소는 수수께끼 풀기이기 때문에 이런 간단한 힌트를 찾아내는 것은 영화보기를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미술부를 영화의 근간으로 설정한 이유는 아마도 미술실에서 거울을 보고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다음날 생각해보니 미술실에는 거울이 없더라 라는 학교 귀신이야기의 고전으로부터 온 듯하고 일견 아주 타당한 설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늙은여우의 죽음을 그린 지오의 섬찟한 그림은 과거 러시아에서 유아살해범의 얼굴을 자기 학교에 배달오는 도살장의 직원얼굴을 그려넣음으로써 잡아냈던 이야기를 떠올리게도 하고 학교 건물 특히나 학교 복도라는 것은 미술적 측면에서 원근과 소실점에 대한 근원적 이해차원을 떠나서 폐쇄된 공간을 잡아낼 수 있고 -양쪽만 귀신이 통제하면 대상은 독안에 든 쥐(?)- 그리고 멀리 복도의 소실점 끝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점프컷으로 이동하는 귀신의 형상은 고전적이면서도 결코 빼버릴 수는 없는 호러영화만의 미학을 지닐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 소실점으로부터 광원을 설치하고 빛을 뿜어내는 식의 엉터리 기교나 부리는 그런 영화 였다면 애시당초 이런 얘기를 늘어놓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헨드 헬드가 지닐 수 없는 강점을 지닌 스테디 캠의 마치 스탠리 큐브릭의 80년작〈샤이닝〉 의 복도 시퀀스를 떠올리게 하는 유려함도 빼놓을 수 없는 가치 -물론 양면의- 였고 복도 시퀀스에서의 아쉬운 장면이라면 은영이 진주에게 쫒길 때 터지는 복도의 유리창 장면이었는데 이건 역시나 자본의 문제인가 보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그 장면이 아마 은영의 뒷면에서 직접적으로 깨어지는 장면인 줄 알았는데 서너칸 씩 건너서 터지는 장면과 그리고 피어오르는 화약연기는 그나마의 연출에 있어서의 옥의 티라고 말하기 보다는 지금 우리 상황에서의 최고 수준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단지 돈이 좀 더 있었다면 Sugar glass를 사용해서 은영의 바로 뒷면을 강타하는 연출을 했더라면 훨씬 리얼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연출과 기술적 측면에서 아쉬움으로 남았다.


애초에〈여고괴담〉을 볼 생각은 없었다. 전북권에 유일하게 남은 미혼 친구가 갑작스럽게 영화보자고 조르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지만 영화보기는 정말 능동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를 보지 않을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예고편에서 보여지는 점프컷을 통한 석고상의 클로즈업 -영화보기 전까지는 썩은 시첸줄 알았다- 장면이〈킹덤〉과 너무 유사해서 ‘에이 또 여전한 짓거리를 했군’하면서 안봤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까 예고편에서 봤던 것처럼의 강렬함이 그 장면에서는 너무 반감돼 있어서 놀라기도 했는데 이제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맺어보자면〈여고괴담〉은 결코〈닫힌 교문을 열며〉의 속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그런 논란의 여지를 제공함으로써 일견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그런 문제를 빼고서 보면 이 영화는 상당히 무국적의 영화이기도 하다.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일본 영화적 색채를 띠고 있고 -‘괴담’이라는 단어자체가 우리에게는 너무 생소하지 않은가- 학원가를 다루는 이야기는 일본이 상당히 독자적인 경지에 올라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분히 포르노적이어서 탈이지만- 모티브로 삼고 있는 학교안에 살고 있는 귀신의 이야기조차도 이미 드라마 안에서 거의 흡사한 내용으로 한차례 써먹은 적이 있었고 학원가의 이지메를 소재로 하는 것마저도 아직까지는 우리의 현실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9년간 재이가 이름을 바꿔가며 학교를 다녀도 아무도 친구하지 않았다는 설정은 좀 무리가 따른다 싶다. 우리의 학생들이 아직은 조건 따져가며 친구를 사귈 만큼 되바라지지는 않았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만 무리한 상황설정은 그만큼의 위험을 동반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우리의 학교 우리의 학생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무국적 냄새가 나는 것은 어쩌면 그 연출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우리에겐 구미호가 재주 넘는 이야기가 훨씬 인간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이야기에 아직은 초보 단계에 가까운 CG테크놀러지에 외국 호러영화의 분위기를 끌어오는 것이 위험하다는 발상은 글로벌화 되어가는 세상안에서 로컬주의를 표방하는 편협한 사고방식일 수도 있지만 오래전 스필버그가 우리 영화를 보고 한 말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한국사람들은 헐리우드를 따라오려고 하지 말고 한국영화를 하라는 그의 말이 반(反)헐리우드에 대한 이념의 논쟁이 아니라 우리 것을 찾아야 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너무나 타당성있게 들리기 때문이다. 수많은 헐리우드 키드들의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정말 세상 안에서 성공하는 영화들은 자신들만의 세계에 파고 들어가 그것을 세계안의 감수성으로 발전시키는 영화들임을 피부로 느끼면서 지금 우리 만의 색채로 우리 만의 정서를 담는 몇 안되는 진정한 우리의 시네아스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이 영화가 나에게 호러 영화가 아니라 감동의 영화 였다는 사실이다. 지오의 책상에 떨어지는 핏방울 -밀도가 너무 떨어지지만- 을 보면서 그리고 교실안에서의 부감(浮瞰)쇼트로 내려다 보여지는 학생들을 보면서 천장에 무언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고 그리고 지오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천장의 핏자국, 그리고 그 핏자국의 늘어남은 정말로 나에게 이건 무언가 하는 궁금증을 유발 시켰었다. 과거의 친구와 현재의 친구를 찾은 진주(재이)가 검푸른 칠판속으로 9년간의 한을 접고 사라지는 장면에서 이 영화가 정말로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점점 소멸되어가는 친구들간의 믿음과 신뢰 그리고 우정에 대한 영화가 아닌가 싶어졌다. 그리고 교실 가득히 그 진주의 것이자 지오의 책상에 떨어지던 핏자국으로부터 시작되는 말 그대로 혈우(血雨)가 온 교실을 뒤덮는 장면에서 만약 피의 리얼리티가 농후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싶은 생각과 동시에 잔잔한 감동이 내 안에 일기 시작했었다. 그건 위의 모든 요소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영화를 잘 봤다는 나만의 이유를 지닐 수 있는 요소였고 새롭게 쓰여질 수 있는 한국영화안의 ‘피의 시학(詩學)’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마지막에 와서야 난 이 영화의 주인공을 알 수가 있었다. 그건 바로 ‘우리의 교실’ 이었다. 지오도 진주도 은영도 소영도 정숙도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모두가 그 안에서는 침묵해야하는 학교안에서 그리고 학생들의 지난한 슬픔과 반복되는 악순환의 이 모든 역사를 가로 지르는 그 한가운데 3학년 3반으로 대변되는 피울음을 간직하는 교실이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서럽게 우는 교실의 피울음 속에서 나도 소리없이 울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피울음의 정체는 그 안에서 눈물 흘린 모든 학생의 보이지 않는 울음의 이상적 현실화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면에서 소리없이 우는 내 마음을 그렇게 또다시 돌려놓는 것은 날이 밝아 변함없는 교실과 죽은 정숙이 이제 다시 이 학교의 괴담을 이끌어갈 후계자가 되었고 ‘김완선 눈’의 서러움이 누구보다 많은 정숙이 돌아왔다는 사실은 속편이 제작된다면 훨씬 더 많은 죽음과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과 그 안에 깔려져야 할 교육계의 숙제가 더 많을 것이라는 비관적 암시속에서 극장 문을 나서는 암울함을 던지는 그리고 우리가 해결해야 할 숙제를 지니고 나서는 무거움이었다. 그 무거움 때문인지 영화속 그림 때문인지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두장의 그림이 떠올랐다. 하나는 뭉크의 1893년작〈절규〉였고 하나는 고야가 1821에서 23년에 그린〈아들을 삼키는 사투르누스〉였다.



뭉크의 작품은 그 일그러진 자아에 대한 인간 내면의 불안한 모든 심리를 내재하고 있는 듯 해서 좋아하는 작품이고 고야의 작품들은 다 좋아하는데 특히 이 작품은 신화에서 바탕한 자식을 잡아먹는 신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라(제우스의 아버지)고 설명하면 이해가 쉽겠지- 의 처참한 모습과 이성을 마비한 동공이 주는 섬찟함이 굉장히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작품인데 체벌교사에 대한 경질 논의가 제시되는 요즘에 와서 더욱 생각나는 그림이기도 하다.〈여고괴담〉을 보고 나서면서 뭉크의〈절규〉는 귀신을 동원해서 자신의 정체없는 몸짓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의미였고 고야의〈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진정 이 모든 논의가 백년지대계라 일컫는 교육 안에서 그 본질을 망각하고 단지 수단인 이념만으로 아이들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져서 였다. 시작이 어디서부터든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시작이 되는 것은 중요하고 그리고 시작이 되었다면 올바른 길을 찾아내는 것이 이제 관점을 제시하는 객체의 손과 머리를 떠나서 그 생각의 주체인 우리의 몫일 것이다.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말이다. 이상으로 ‘싸움터에서 생각하기’의 3부작 또는 2부작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끝까지 읽어주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Text : Minerva's Owl (98-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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