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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틴 블럭 - 16 Blocks, 2006>

<식스틴 블럭>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제 점점 더 액션씬 -단순한 액션이라고 하기에 브루스 윌리스가 등장하는 영화들은 조금 더 복합적인 장르혼종속에 놓여있다- 을 소화해내기가 어려울 듯한 노년의 나이에 접어드는 브루스 윌리스를 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테러나 집단 인질극을 바라보는 제작자들의 관점이 변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제작하는 이들의 관점이 변했다라고 보는 것보다는
대중의 관점이 변한것에 초점이 맞춰진 하나의 정사진같은 이미지를 보는 기분이 더 맞는 듯 싶다.
<식스센스>이후 헐리웃 영화들은 거의 대부분 반전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은데.. 그 과도한 강박증의 산물이라고 불러도 될 듯 <식스틴 블럭>은 끊임없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서 '노력'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짧은 순간의 반전이라고 하는것들이 거의 관중의 의식안에서 뻔하게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부분의 선을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은데..
영화는 서두에 녹음용 카세트 테이프에 브루스 윌리스가 인질극을 벌였던 버스 안에서 혼자 남아 유언을 남기는 장면을 도입부로 시작하고 있고 영화가 후반부로 들어가면서 그 장면에 도달했을 때 관중은 서두의 도입부가 왜 등장했는지 서서히 이해하게 되고 브루스 윌리스가 이곳에서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 그렇게 영화가 끝나버리기엔 너무 허무한 탓일까.. 이전에도 있어왔지만 그 이후에도 끝없이 짧은 반전을 노리며 영화는 끝을 향해 달려간다.
이 영화에 주목할 만한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이 버스 인질극안에 놓여있다.
이전까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인질극을 벌이는 테러범 -편의상 테러범이라고 포괄하여 표기한다- 들과 시간을 보내는 사건의 인질들은 테러범들의 생각과 인간적인 감정선에 동요되는 이른바 '스톡홀름 신드롬 (헬싱키 신드롬)'에 빠져들게 되고 사건 전후에 인질들은 테러범들을 도와주거나 도움을 주는 증언을 하는 등의 행동양식을 익숙하게 보아왔다.
영화 <식스틴 블럭>안에서의 버스인질극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흘러갈 듯한 모습과 정황을 보여주지만 인질극이 끝나는 순간부터 인질들은 그 익숙한 과정의 정형성을 무참히 탈피해버린다.
주인공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영화안의 두 개의 증언은 미국인들에게 드리워진 커다란 테러의 후유증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듯 생각된다.
테러범을 바라보는 시각, 인질극을 벌이는 공간안에서 이제 인간적인 감정의 동요같은 것은 미국 대중들의 생각안에서 허용치 않고 있는 듯 하다.
그것이 단순하게 반전에 반전을 노리고 있는 영화의 내러티브 안에서 반전을 위해 선택된 것이라고 보여지기엔 이제 그들의 내면은 너무 황폐해져 있는 듯 싶다.
언제쯤 그 황폐한 마음의 대지에 새로이 푸른 벌판이 자리잡게 될 것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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