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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비트}

빨간부엉이 2006. 3. 19. 22:39


{영화 ‘비트’에서의 소외라는 이름의 청춘담론과 미장센의 결여에서 오는 유행과의 철저한 담합에 대하여}




홀로 웅크린 방안에서 먼지 부옇게 낀 거울을 통해 혼탁한 세상을 떠돈다. 마주 보이는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선한가 아닌가 하는 愚問을 던진다. 영화 ‘비트’는 어쩌면 그 우문에 대한 대답이 되기 위해서 시작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열 아홉 이라는 나이가 주는 우리 사회 속의 제도적 정형성이 묶어두지 못하는 일탈의 무리들이 빚어내는 문제는 비단 가출과 자살, 마약과 섹스와 이지메가 아니라 일순의 감정혼돈과 갖추어지지 않은 의식세계로부터 오는 부유(떠돎)함이 더 큰 문제가 아닐는지. 열 아홉의 나이로서 가지는 영화속 아웃사이더들의 심리적 담론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학교- 적어도 그들에게는 모든 갈등의 진원지이다. 해방이후 베껴버린 6-3-3-4의 서구적 제도속에 의식도 문화도 모든 것이 서구화되어 가고 있고 옮긴다는 것은 어디에서 무언가 흘려버리듯 그들은 학교에서 무언가를 가지는 피 전달자적 위치보다는 반항하고 일탈하고 대부분의 학생이 가지는 의식의 영웅적 반영처럼 떠난다. 질주- 달린다. 그들은 정적으로 존재 하지는 못한다. 어디엔가 안주하는 것을 그들은 고리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손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질주본능의 대변자 -라노스가 아니다.- 모터싸이클이며 그들은 단지 달릴 뿐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적어도 질주할 때만큼은.
우정- 뜨거운 국물과 몇 병의 소주. 갱스터 영화에 대한 미련스런 오마쥬처럼 그들은 어긋난 관행을 만들고 그것을 물신화시켜 목숨처럼 지켜나간다. 우정이라는, 의리라는 미명아래.
밤- 밝은 햇살아래 서기에 스스로 부끄러움일까. 어둠과 네온 불빛과 취객의 욕지기 속에 모든 삶이 있다. 가두지 못하는 학교의 가르침 대신 거기에서 우정을 지키고, 달리며, 사랑이라 스스로 생각하는 그리움을 지니고 때론 행동하며 때론 치기적 사유를 한다. 어둠은 그런 힘을 주니까.
피로와 혼란- 자신의 의식을 정립치 못한 자. 결론적으로 피곤하다. 그리고 혼돈스럽다. 의식의 혼탁스러움을 위해서 담배 연기로 자신을 가리고, 알콜속에 의식을 자아와 분리시키기를 서슴치 않는다. 해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임을 알면서도 피곤과 혼란의 이유로 어지러운 세상과 혼탁한 정치판과 그릇된 교육관행 등을 꼽기를 자연스럽게 행한다. 누구나 산다는 것은 피곤한 것임을 그들은 모른다.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개인적으로 자멸해가는 우리 청춘송가여!
영화가 추구하는 -많은 잘못된 베끼기를 떠나서- 새로움이 이중 삼각관계와 갱스터 영화 장르의 컨벤션으로 복귀할 때 비트는 사라지고 단지 어제도 있어왔고 지금 현재도 스크린에 존재하며 내일은 거리에서 행해질 일상의 이름으로 비트는 그렇게 소멸한다. 내가 이 영화 ‘비트’를 보고서 느낀 감정의 일편이다.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이미 만들어졌으면 옮겨오고 그것이 세상이고 삶이지만 지금 우린 그렇지 못하다. 누군가의 사고와 기술과 노하우라는 것은 언제나 앞선 자의 몫이고 그것을 도용하는 것을 우린 이제 표절이라 부른다. -좋게 말하면 오마쥬이고- 영화 ‘비트’는 소위 왕가위 풍의 도발적 채택 -좋게 말해 채택이고 사실을 베끼기이다.- 과 조명의 현람함의로 무장한 감성자극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그렇다. 누군가가 한 것을 다른 누군가는 써서는 안된다는 법은 없지만 이제 정말 우리나라에서 왕가위 風은 썰렁하기만 하다. 한때 나도 ‘중경삼림’이나 ‘타락천사’의 스텝 프린팅과 조명, 보이스 오버, 젊은 군상의 방황에 대한 담론에 열광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물며 감독이라는 직책과 한국영화라는 이름을 차용한 여타 감독들이 과연 그러하여야만 하는 것인지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끔 만든다. 영화 ‘런어웨이’로 데뷰를 한 김성수 감독은 전작에서의 실패를 공격적 도용으로써 만회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조금 우울 -영화 내용 때문이 아니다- 해 지기까지 했다. 영화는 허영만 -내가 무지하게 좋아하는 만화가들 황미나, 허영만, 박봉성 등등 중 하나다- 의 만화 ‘비트’에서 전반부를 차용하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장르의 컨벤션으로 복귀하며 영화를 정형화시키는 -어쩌면 카타르시스를 위한 의도적 ‘한 수’일런지도 모르지만- 후반부로서 끝을 맺는다.
영화가 인물 중심인가, 스토리 중심인가, 감각 영상을 중심으로 한 것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한다. 일부적 성공이라면 환규라는 인물의 부각이다. 영화속에서 환규는 참으로 사랑스럽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 보이는 놀라운 순수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그러나, 주인공인 민과 로미는 어떤가. 원작에서의 냉소적이며 철학적 사고를 지니는 민의 미소나 스토리 보드는 어디에도 없다. -정우성의 연기는 ‘본투킬’에서의 길이라는 칼잡이 마냥 화면과 분리되어 있는 기분이며 단순한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오토바이는 야마하의 V-MAX 1200(魔神)에서 혼다의 CBR 600으로 바뀐다- 또한 로미는 어떠한가.지나칠 정도의 카리스마를 지닌 그녀를 결국 -고소영의 연기가 로미를 소화해 내기는 부족하지만- 한 남자를 기다리는 전통적 여인으로의 회귀 밖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결국 이 영화는 인물들의 갈등구조나 심리 상태로써는 비트가 없다. 스토리 중심이라면 너무나 도식 적이지 않은가. 적어도 로미가 로미답게 그녀의 얘기를 전개할 때까지만 해도 스토리로써의 영화가 되리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태수의 부각과, 민과 태수의 동반적 죽음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감정에 이끌리는 인물의 갱스터적 전형으로써 결국 또한 비트를 감가적이지 못하게 하는 요소속에 있다. 그렇다면 감각적 영상과 음악인가? 여러 장르로 시도되는 렛잇비나 크래쉬의 작열하는 음악은 자조적이며 정열적인 무엇인가를 영화에 부여하였지만 영상은 음악을 받쳐주지는 못했다. 초당 12프레임으로 찍고 24프레임으로 늘려 보여주는 기법 -로미의 자해 기도나 부모와의 대립장면에서- 으로 실험적인 면모를 보여주지만 남발하는 스텝프린팅과 스테디 켐, 핸드 핼드 촬영장면등은 역시나 식상된 장면임을 부인치 못한다. 혹평이라고 생각될런지도 모르지만 사실 우리의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남의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이 입에 맞지 않는 음식과 옷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울리지 않듯 그러하다. 우리에겐 우리것을 지키고 개발해야 하는 의무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 허영만의 이전의 인기작들 -‘망치’나 ‘날아라 슈퍼보드’ 등의 강타라는 인물 이후의 작품들 -도 일본의 만화 영화 작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 , ‘마녀 우편배달부’ , ‘빨간 돼지’ 등의 작품 속의 이미지들을 빌려 온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을 품게 하기도 한다. 어디 그것 뿐인가. 노래나 드라마 어느것 하나 일본으로부터 베끼지 않은게 없는 것이 요즘 우리 문화의 실태가 아닌가 말이다. 일부 방송국에서는 공공연하게 일본 TV 드라마 테잎을 가져다 놓았으니 보라는 공고문까지 붙여서 인기적 요소의 베끼기를 부추기는 실태이니 더 말해 무얼하겠는가. 이제는 정말 우리 영화가 한국판 ‘사랑과 영혼’-고스트 맘마- 이나 한국판 ‘천녀유혼’-은행나무 침대-이니 하는 가슴아픈 얘기를 듣고 싶지가 않다. 수상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자기만의 것으로써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우리 영화가 조금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얘기가 이상한데로 흘렀는데 사실 그렇다. 관심이 없으면 내가 뭐한다고 이 밤에 잠도 안자고 이런 얘기 하고 있겠는가 말이다. 영화 ‘비트’는 위의 실수를 담보로 하고 좋은 영화 제작을 위한 김성수 감독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만화를 원작으로하여 성공한 우리 최초의 영화가 될지도 모르며 아웃사이더의 미화로 더 많은 청소년을 거리로 내몰것이며 (?) 내용과 형식의 겉돎을 보여주지만 어떤 사유의 힘을 주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될 것이다. 단지 폭력미학과 생각할 여지의 여백미가 없는 영화만이 한국의 미래라면 더 이상 우린 한국영화 상영관의 변두리화를 막지 못하고 말 것이다. 영화 ‘트레인스포팅’에서 주인공들이 스코틀랜드의 현실상을 적나라하게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본 그 영화에서의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이기 팝의 음악으로 무장한 대니 보일의 영상미가 그 한 장면에서 더욱 부각됨에 나 스스로 놀라기도 했었다. ‘비트’에 그런 장면이 없느냐구? 물론 있다. 영화 전체의 분위기와 요즘 신세대들을 대변하는 말 ‘나는 나’. 좋은 말은 아니지만 영화를 시대상과 반영하여 살리는 그런 기분이 -‘비트’가 노리는 것은 아웃사이더들의 무개입적 삶에대한 세상의 이해이기 때문에- 든다. 영화를 보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영화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점에서 결핍되는 무엇으로써 난 이 영화 ‘비트’를 강한 리듬으로 기억하고 싶다. 중국에 이런말이 있다. ‘온사람은 좋지 않고, 좋은 사람은 오지 않는다’ 철저한 비평적 관점이 아닌가. 비틀림으로써의 세상과의 조우는 결국 자신을 아웃사이더의 측면을 넘어서서 벼랑으로 차를 몰아가는 ‘델마와 루이스’가 되게 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민이나 태수같은 인물을 자신의 페르소나로서 여기는 젊음이 없기를 바래본다. 또한 ‘열화전차’와 같은 질주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하다. 불가능에 대한 도전은 그러한 것이 아님을 알기를 바라며 이상 쫑.

Text : "생각산실 빨간얼굴의 97년 5월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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